하닮의 여정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읍시다-2022.3.22.사순 제3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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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22.사순 제3주간 화요일                                                 다니3,25.34-43 마태18,21-35

 

 

 

하닮의 여정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읍시다-

 

 

 

“너 자신을 알라!”

영원한 경구이자 진리입니다. 제일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제일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남들은 다 나를 아는데 나만이 나를 모를 수 있습니다. 모르면 알려줘도 모릅니다. 이래서 경청을 그리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도 “들어라”로 시작되며 예언자들의 무수한 예언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이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도저히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것이 무지입니다. 요 몇 년간 강론 때 참 많이 강조한 것이 인간의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질병이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의 기도뿐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회개의 기도를 통해 겸손과 지혜요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갑니다. 그러니 하느님 없이는 기도도 회개도 겸손도 지혜도 자비도 없습니다. 도저히 내가 누구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무지의 어둠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맬 수 뿐이 없습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아감으로 참 사람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느님께 기도입니다. 바로 제1독서의 바빌론 유배중 화덕에서의 시련중 기도하는 아자르야가 그 모범입니다. 말 그대로 회개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환히 드려다볼 수 있는 기도입니다.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기도하는 아자르야, 참으로 시련중에 열렬히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그 무슨 시련도 그 누구도 기도하는 사람을 다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회개와 더불어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참 나의 발견이요 진정한 겸손입니다. 용서하는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감으로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찬미와 감사기도에 우선하는 것이 회개의 기도, 통회의 기도요 이 또한 하느님의 바라시는 바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용서 받을 때 순수한 마음이요 참나의 회복입니다. 회개를 통한 용서로 무지에서 벗어난 깨끗한 영혼에게서 터져 나오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은 반기십니다. 바로 사순절은 집중적 회개와 통회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권고입니다.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이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지는 것이다.”(성규49,2-4).

 

끊임없는 회개의 기도가 하느님을 닮아 끊임없는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물음에 하느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예수님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무한한 용서를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지의 죄는 무지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몰라서 심판이요 불용서이지 참으로 자신의 무지를 안다면, 자기의 한계와 부족을 안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음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때문임을 깨닫는 다면 용서는 마땅한 책무요 의무입니다. 그러니 밥먹듯이, 숨쉬듯이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이기에 용서받으며 서서히 무지에서 벗어나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이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가 무지한 인간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만탈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는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탕감받은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무한한 사랑의 빚을 탕감받아 용서 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는 참으로 인색하고 잔혹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인간의 절정입니다. 참으로 탐욕의 무지에 눈이 멀 때 인간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바로 이 무지한 사람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경구입니다. 

 

이래서 회개의 기도를 통한 자비하신 하느님으로부터의 용서의 체험이 절대적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용서를 통해 자기를 알 때 주님을 닮아 겸손이요 지혜요 자비로움입니다. 정말 만탈렌트 빚진자가 회개의 기도를 통해 무한히 탕감받은 하느님의 은혜를, 자신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처럼 무정하고 매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자비하신, 무한히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주인은 그대로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무지한 인간이기에 부족하고 마음이 들지 않더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안되면 용서의 지향을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회개해서 용서이지만 반대로 용서의 사랑이 회개를 촉발해 무지의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치유제는 회개뿐이요, 무지의 악에 대한 처방은 용서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용서해야 용서받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사실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을 밝혀 주시어 서로 용서하게 하시고 날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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