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7.사순 제4주일(장미주일, Laetare 주일)
여호5,9ㄱㄴ.10-12 2코린5,17-21 루카15,1-3.11ㄴ-32
하느님의 기쁨
-“부끄러워 합시다. 그리고 회개합시다”-
참으로 좋은 분이나 글은, 또 어떤 불행한 일들은 우리를 거울처럼 비추어 주며 한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큰 깨우침과 가르침을 줍니다. 길이 남아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왜관수도원 2022년 봄호 계간지 ‘분도’지에 나오는 이덕근 마르티노 아빠스의 인터뷰 기사가 그러했습니다.
마르티노 아빠스는 1985년에 아빠스직에 선임되어 1995년까지 소임에 충실하다 만10년만에 내심 약속한대로 과감히 아빠스직을 사임한 분입니다. 참으로 집착없이 아름다운 떠남의 모범을 보여 준 분입니다. 길다 싶지만 공감하면서 부끄러움과 더불어 큰 가르침이 된 참 진솔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날 우리는 팔공산 기슭 한 암자에서 84세 참 은수자를 만났다.’로 시작되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우리 수도원 형제 한 분이 나를 ‘팔공산 곰’이라고 놀립니다. 나는 햇수로 28년째 이곳 군위 성 바오로 안나의 집 사제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단 한번도 미사를 궐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도 세끼 모두 스스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수녀원에서 ‘점심 한 끼라도 저희가 해 드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점심만 해 주는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알밥(햇반)을 데펴 먹고 저녁에는 라면(감자면)을 끓여 먹습니다. 처음엔 청소가 가장 힘들었어요. 그것도 운동 삼아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눈이 침침해진 뒤로는 갖고 있던 책을 모두 수녀원에 기증하였습니다. 영적 독서 책만 몇권 남겨 두었습니다. 책장은 수녀원 병실의 약장으로 사용합니다. 텔레비전도 수녀원에 기증하고 라디오만 듣습니다. 텔레비전은 바보로 만들지만, 라디오는 상상하게 하거든요. 역류성 식도염도 있지만 많이 좋아져 잠을 잘 자지만, 관절염으로 손을 많이 떱니다. 피부염도 있지만 약은 가능한 조금만 먹고 하루 30분 이상 걷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부유하지요. 이러한 단순한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김 보스코 신부님과 김 라자로 수사님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요. 특히 라자로 수사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이발을 해주러 옵니다. 보스코 신부님은 매일 문안 인사 전화를 합니다. 젊은 형제들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들도 늙으면 아름다운 수도원의 전통이 됩니다. 노인이 되면 더 외롭기 마련입니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이 복음 말씀이 나의 사목 표어입니다. 수도자의 삶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와 형제애와 단순성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내밀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길어진 이곳 삶이 가능했던 것은 젊을 때부터 익힌 ‘예수기도’ 덕분입니다. 형제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이웃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힘닿는대로 실천적으로 단순하게 사는 것입니다. 가진 것도 단순하게 사고도 단순하게 하면 좋습니다. 내가 수십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형제애와 단순성이 수도생활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아빠스직을 사임할 즈음에 정리한 생각입니다. 사실 나는 옷 해 입은지가 10년이 넘었어요. 혼자서 산속에 사니까 옷이 많이 필요없답니다.”
“나는 아빠스 재임 동안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에 힘을 쏟았습니다. ‘후배들을 위하여 돈을 모아야 하지 않는가’ 형제들은 말했지만, 나는 금요강론 때마다 ‘수도원의 돈과 우물물은 안 쓰면 썩는다.’ 하며 가난한 삶을, 나누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제 자신의 수도생활을 성찰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움과 더불어 큰 가르침과 깨우침이 된 내용이라 길다 싶지만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 모두를, 우리 온 인류를 참으로 부끄럽게 한다.” 머릿기사에 영감을 받아 윗 내용을 인용하게 됐습니다.
마찬가지 오늘 그 유명한 복음중의 복음이요 소복음서란 루카복음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면서 회개에로 이끌며 읽을 때 마다 감동하게 되며 늘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늘 새롭게 샘솟는 우물같은 복음입니다. 혹자는 ‘탕자의 비유’ 또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 칭하기도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대표적 인물 셋이 나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와 바리사이 같은 완벽한 삶의 추구자인 큰 아들, 그리고 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귀가한 작은 아들 셋 중 과연 나는 어디에 해당됩니까? 셋 다 반면교사가 됩니다. 어느 한 편 사람이기 보다는 아마도 셋의 모습이 정도 차이일뿐 우리 안에 혼재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때로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일 때도 있겠고 몰인정한 외적 모범생인 큰 아들의 면모도 있겠고 때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작은 아들의 겸허한 면모도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에는 안 나오지만 생략된 셋째 아들 한 분을 상상하니 즐겁습니다. 바로 이 내용을 소개한 하느님의 외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자비하신 아버지를 꼭 닮은 셋째 아들로 자부하지 않았겠나 하는 유쾌한 생각도 듭니다.
정말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부족을 완전 보완하는 자비하신 아버지를 빼다 닮은 예수님입니다. 이 복음을 읽는 우리 역시 자비하신 아버지가 우리 궁극의 목표임을 깨달으면서 아버지를 꼭 닮은 예수님을 우리 평생 삶의 모범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을 회개에로 이끈 것은 불우했던 극한 상황에서 자비로운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의 사랑 가득했던 추억이었습니다. 사랑의 추억이 작은 아들의 회개를 촉발해 고향집의 아버지를 찾게 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을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벌떡 일어나 아버지께 가니 전적인 회개의 순간이자 부활의 순간입니다. 내적으로 파스카 신비가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순간입니다. 바야흐로 회개를 통해 내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 작은 아들의 내면 상태의 묘사처럼 들립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새삼 설명이 없을 정도로 자명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멋지고 탁월한 ‘이야기꾼(storyteller)’인지 깨닫습니다. 노심초사, 오매불망 집떠난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며 귀가한 아들의 환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귀가하는 아들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서 가서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거지’같은 삶에서 본래의 존엄한 품위를 회복한 ‘왕자’같은 모습의 작은 아들입니다. 왕자처럼 살아가야 할 우리들이 자기를 잃고 거지처럼 살아간다면 아버지는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 것이며 우리 또한 얼마나 억울하고 부끄럽겠는지요!
이렇게 돈은 쓸 때 쓰는 것이 사랑이자 지혜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파스카 축제 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 여정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꿈에 그리던 고향집 같은 가나안 땅 예리코 벌판에서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환대에 감격한 아들이나, 이 신바람 나는 장면을 대하는 독자들은 저절로 오늘 다음 화답송 시편을 노래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작은 아들과 이 화답송을 노래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그 찬미가 있으리라.
내 영혼아 주님 안에서 자랑해보라. 없는 이들 듣고서 기뻐들하라.”
마지막 장면, 큰 아들의 반응과 항의, 또 큰 아들을 달래는 한없는 인내의 사랑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인정머리 없는 편협한 큰 아들의 부정적 모습도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 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군요.”
질투로 분노가 극에 달한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아들’로 산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던. 아버지의 자비로운 속마음을 너무나 몰랐던 무지無知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아우가 아니라 저 아들이라 말합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처럼 역시 사랑하는 큰 아들에게 진심을 토로하는 아버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단다.”
큰 아들은 물론 큰 아들같은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해달라는 호소입니다.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곁에서 살면서도 아버지를 몰랐던 큰 아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일 수 있고, 또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자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제 큰 아들이, 큰 아들같은 우리들이 강요가 아닌 자발적 회개로 응답할 차례입니다. 아마도 큰 아들은 내심 몹시 부끄러워 회개했을 것이며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신 아우의 환영 잔치에 기쁘게 참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날마다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 온 우리들에게 기쁨의 미사 잔치를 마련해 주시며 우리 모두 아버지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