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중심인 하느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2022.3.30.사순 제4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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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30.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사49,8-15 요한5,17-30

 

 

 

삶의 중심인 하느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한밤중 깨어나 카톡을 확인하니 아름다운 글이 도착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매입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두편의 시에 매료되어 제 마음에서 정리, 연결해 보았습니다.’로 시작된 글입니다.

 

“성부께서 그리신 꿈의 바탕위에 

성자께서 사랑의 봄꽃으로 생명주시니 

우리 모두 꿈과 생명과 그 사랑에 매료되어

매혹의 찬미가로 화답하며

봄비처럼 젖어드네.”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고백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영성적인 민족이라는 일본학자의 글에 고무되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는 한국 고유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사상사를 꿰뚫고 흐르는 영성의 힘이랍니다. 단군신화부터 21세기 거리의 철학까지 ‘조선사상사’를 쓴 오구라 기조의 책에 대한 서평 일부를 인용합니다.

 

“조선의 사상은 두드러지게 영성을 띤다. 이 영성은 지성으로도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기에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영성은 새로운 사상과 함께 거대하게 약동하며 정치사회사적 변혁의 힘을 분출한다. 이때 영성은 기존의 모든 사상을 아우르는 어떤 회통의 정신을 가리킨다. 영성의 눈으로 사상의 차이를 넘어 전체를 꿰뚫어 보고 통합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런 영성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경우로 신라 원효의 불교 사상과 조선 퇴계의 성리학 사상, 수운 최제우의 동학 사상을 거론한다. 지은이는 이 영성이 21세기 오늘의 한국 사상에까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통찰이 참 통쾌합니다. 이런 영성을 저변으로한 한국이기에 역동적일 수 뿐이 없고 이런 한국의 천주교인들이기에 깊은 영성을 추구할 수 뿐이 없습니다. 몇 저명 인사의 컬럼에 나오는 글도 인용합니다.

 

“인간은 불행을 막지는 못하지만 불행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예술(신앙)인 것 같아요.”

 

“먹고 살기 힘들고, 밤길을 제대로 못 다니고 하지만 법 제도의 변화 말고 다른 식의 싸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내면의 강함, 즉 내적 힘이다.”

 

“유명해지기 보다는 유일해져라. 맞아요. 이런 태도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유일하다는 것은 꼭 필요하다는 뜻이니까요. 많이들 하는 얘기지만 무난한 글이 가장 안 좋은 글이죠. 그런 글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유일한 존재가 되기는 어렵겠지요. 저도 명심할 일입니다.”

 

참 좋은 깨달음의 통찰들입니다. 내적 힘의 원천이자 ‘그렇고 그런’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이 아닌 자존감 높은 내 고유의 참나의 유일한 사람으로 살게 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래야 비교로 인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신학교 시절 교수 신부님의 가르침이 생생합니다.

 

“인간답게 추상적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구체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 나의 고유한 영성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인 예수님이 그 결정적 모범입니다.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줍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의 말씀은 유배지로부터 해방되어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참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한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바로 당신 자녀들인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의 결연한 각오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본래의 유일한 참내가 되려고 평생 노력할 것이며 이래서 하느님의 중심의 삶을 살며 평생 하느님 공부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43,4ㄱ)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의 결정적 모범을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구원의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바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영생을 살아야 할 자리는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도 심금을 울립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와 하나되어 사시는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망합시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이 되려는 것은 허영이요 환상이요 망상입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참나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구원의 행복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하나하나 당신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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