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3.사순 제5주일 이사43,16-21 필리3,8-14 요한8,1-11
참으로 ‘살기위하여’ 할 일은 무엇인가?
-“잊어라, 만나라, 달려라”-
어제의 두 감동적 사례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한분은 수도원에서, 한분은 20여년 수도생활을 하다 수도공동체의 특별 관면을 얻어 2년동안 수녀원 밖에서 살아가는 수도자입니다. 공통점은 참 치열히, 성실히 책임을 다하며 감동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친절한 분이 1년전 선물한 견고한 좋은 집무실 의자였는데 잘못 사용한 탓에 한쪽으로 몹시 기울어 수도형제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제 오전부터 오후 피정때까지 온종일 보이지 않아 저녁기도후 어디 다녀왔느냐 물어봤더니 하루 종일 일했다는 것입니다. 수도원 주님의 집에서 무려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함께 33년을 살아왔으니 어느 혈연의 형제보다도 더 오래 살아 온 주님의 형제 수도자입니다. 집무실 의자를 점검한 후 수도형제의 처방이었습니다.
“버려야 하겠습니다. 한쪽이 깨져 금이 갔습니다. 한쪽에 기대다 많이 잠을 잤나 봅니다. 다시 주문해 드릴까요? 인터넷 주문하면 즉시 옵니다.”
“그냥 놔두세요. 나무 의자를 사용하겠습니다.”
나무 의자로 대체하니 공간도 적게 차지하고 단순해서 정말 좋았습니다. 형제는 번쩍 무거운 의자를 머리에 얹고 들어다 안뜰에 있는 트럭 위에다 놓았습니다. 참 하루 종일 노동에, 친절한 배려와 적극적 도움에 감동했습니다.
또 한분은 6개월 만에 고백성사차 연락하고 '종합전병' 선물을 사들고 수도원을 찾은 수녀입니다. 수녀원밖에서 참 치열하고 열심히 삶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분입니다. 수녀원에서 특별 관면후 나온후 6개월간 방을 얻어 자취하면서 국가의 도움을 받아 학원에 다니며 두 개의 자격증을 얻었고 2개월 반 취업을 하며 지내다가, 다시 면접에 합격하여 내일부터는 새 직장에서 3년간 계약직으로 일하게 됐다 했습니다. 워낙 적극적으로 치열히 사는 분위기를 감지했던지 여러곳의 면접에도 모두 합격했다는 것입니다.
“아, 삶은 전쟁입니다. 먹고 살며 생존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서바이블 생존 게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계속 길을 열어 주셨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셔서 잘 지냈습니다.”
수녀원 있을 때에는 온실 속에 곱던 화초같은 분이 이제는 최전방最前方 야전野戰의 ‘주님의 전사’가 된 씩씩하고 강건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참으로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정말 ‘살아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스러웠습니다. 후에 청초한 수선화꽃 사진과 함께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고 답신도 받았습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지금까지처럼 힘껏, 치열히, 멋지게 사세요! 주님께서 함께 늘 도와 주십니다. 수선화꽃 청초한 사랑에 위로와 힘 받으세요. 사랑하는 수녀님!”
“수사님, 용기와 축복의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힘이 납니다. 건강하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요즘 젊은이 세대를 일컬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다, 여기에다 인간관계와 집을 포기한 ‘오포세대’, 또 여기에다 꿈과 희망을 포기한 ‘칠포세대’라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젊은 세대들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참으로 치열히 간절히 찾고 두드리면 구원의 길은 구원의 문은 열리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참으로 ‘살기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답을 드립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참으로 살기 위하여!”이고 구체적 처방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잊어라!”입니다.
믿음으로 과거의 상처나 아픔을 말끔히 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영성대가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이미 지난 과거입니다. 하느님은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일체 묻지 않고 불문에 붙입니다. 회개는 언제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체없는 지금 여기서의 회개가 백번 낫습니다.
이미 회개하여 용서받은 과거에 대하여 아파하거나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하느님께서 절대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미 지난 용서받은 과거는 일체 거론하지도 떠올리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악마의 유혹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이를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공동번역의 성경이 더 실감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고,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이사43,18-19)
윗 성구는 제가 고백성사때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간음하다 사로잡혀 죽을 뻔하다 살아난 일화가 참 감동적입니다. 흡사 예수님의 자비와 지혜의 하느님 화신처럼 보입니다. 그대로 예수님께 고백성사를 받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도 지난 과거를 잊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비하신 주님의 용서의 은총이 과거를 잊게 하는 최고의 명약입니다. 그러니 잊으십시오. 특히 용서 받은 어둡고 아픈 상처의 기억을 잊으십시오. 하느님의 용서 은총이 과거를 치유하십니다.
둘째, “만나라!”입니다.
바로 사랑의 주님과 만남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과거를 잊었고 사랑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밖으로 멀리 찾아갈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늘 우리 곁에 함께 계신 자비와 지혜의 파스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 살아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간음하다 사로잡혀 예수님 앞에 있는 여인이 참 가련합니다.
절체절명,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공격이 참으로 사악하고 절묘하여 예수님도 여인도 꼼짝없이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침묵중에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에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침묵의 기도시간, 군중들은 잠시 흥분을 가라 앉혔을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참으로 예나 이제나 널리 회자되는 천상 지혜의 명언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의 마음에서 나온 천상 지혜의 말씀입니다. 자비는 지혜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중에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거룩하고 멋진지요.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자 하나둘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회개하여 다 떠난 것입니다.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는 나이 많은 이들이 오래 살았기에 죄도 많이 지었을 것입니다. 사실 살면서 보이지 않게 실제로든 마음으로든 간음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순간 여기 있던 사내들은 노소불문하고 자신이 부끄러워 소리 없이 다 떠났던 것입니다.
순간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서 가련한 여인의 처지도 생각하며 자신들의 무자비함에 대해서도 몹시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흡사 군중이 공동 고백성사를 보고 떠나는 장면같습니다. 말그대로 전화위복입니다. 중죄의 용서를 통해 자비와 지혜의 주님을 만난 죄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중 주님을 직접 대면하여 만난이는 죄녀뿐입니다. 아마 죄녀는 평생 주님의 자비를 잊지 않고 구원의 현재를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살아가야 할 때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주님을 만나 용서 받고 늘 새롭게 살아갈 힘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죄를 짓는 일이라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지체없이 회개를 통해 용서 받으라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 날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짐으로 참사람의 참내가 되어가는 우리들입니다.
회개를 통한 용서의 열매가 자비와 지혜, 겸손입니다. 바로 이것이 날마다 체험하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주님을 만나 용서 받음으로 극적 반전하여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을 살게 된 죄녀입니다.
셋째, “달려라!”입니다.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희망의 주님입니다. 삶에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제대로의 방향입니다. 희망의 주님을 향해 참으로 주님의 전사답게 씩씩하고 용감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 받은 죄녀에게 “가거라!” 파견을 명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주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누가 감히 주제넘게 남을 단죄합니까? 그러니 다시 삶의 자리로 복귀해 주님을 사랑하고 찾으며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생생한 희망을 둘 때 죄를 짓지도 타락하지도 않습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들을 상실하면 곧장 밀려오는 감미로운 죄의 유혹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최고의 예방 처방 명약이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바오로의 육성을 듣는 듯 감동적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나를 가득 채울 때 비로소 과거의 쓰레기들은 저절로 일소되기 마련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으로 고무적이고 힘이 납니다.
“나는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역동적인 목표와 방향 뚜렷한 삶인지요! 이래야 비로소 과거로부터의 해방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바오로의 유언같은 말씀도 기억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2티모4,7-8ㄱ)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도 “너희는 생명의 빛이 있는 동안에 달려, 죽음의 암흑이 너희를 덮치지 않도록 하라”(성규;머리13)고 권고하십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살기 위하여, 과거를 잊으십시오, 주님을 만나십시오, 희망의 주님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바로 이게 진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