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8.사순 제5주간 금요일 에제20,10-13 요한10,31-42
예수님은 누구인가?
-“한결같이 늘봄”을 사셨던 분-
어제 강론시 제가 예수님께 지어드린 “늘봄”이란 호가 참 마음에 듭니다. 마침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감사합니다. 작년 여름 ‘늘봄 마을’로 이사왔는데 바로 예수님 마을이네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강론 댓글을 보니 참 잘 정했다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주의 요셉 수도원을 ‘배꽃 마을’이라 부르는데 ‘늘봄 마을’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아마 1주일 정도 지나면 배꽃 만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요즘 봄꽃들 만발한 파스카의 계절입니다. 아마 일년중 가장 꽃들 많이 피어나는 시기일 것입니다. 인고忍苦의 겨울을 지내고 부활의 봄에 피어난 꽃들이라 한결같이 청초淸楚합니다. 올들어 세 번째 인용하는 제 좋아하는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들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생명이다”-1999.3
요즘 개나리꽃들의 샛노란 청초함이 단연 눈길을 끕니다. 우리나라 산야山野의 대표적 봄꽃은 아마 개나리와 진달래일 것입니다. 역시 오래전 써놨던 “개나리”란 시도 나눕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2001.4.11.
파스카의 계절 “늘봄”같은 예수님입니다. “늘봄”에 하나 더하여 “한결같이”란 호를 예수님께 붙여드리고 싶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한결같이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본기도시 ‘한결같이’가 들어간 두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주님, 저희가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며”
“주님, 저희가 한결같이 거룩하게 살아 영원한 상속을 받게 하소서”
그러고 보니 한결같이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진짜 늘봄 마을이자 예수님 마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 서울교대부국을 방문했을 때 동산에 세워진, 이미 고인인 된 서울교대부국 교장으로 재직중 병사한 '박대한' 제 친구의 “한결같이”란 글이 새겨진 기념비도 감동이었습니다. 아마 제 친구의 좌우명이었던 듯 합니다. 교직원들은 물론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분이었습니다.
세상을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변절자들과 배신자들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제 주변을 보면 우리 수도형제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처럼 언제나 한결같이 늘봄을 살아가는 분들을 자주 발견하곤 합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평범하나 확실한 성인들입니다. 오늘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두 권의 새책이 반가웠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일독一讀 하려 합니다.
“꽃동네 40년사”(1976-2016)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전하는 삶의 깨달음”
꽃동네의 창설자 오웅진 신부 없는 꽃동네를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말들도 많지만 제가 볼 때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닌 오웅진 신부 역시 예수님을 닮아 한결같이 늘봄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를 보면 예수님과 예레미야 역시 한결같이 늘봄을 살았던 분임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의 삶입니다. 사실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제1독서의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친구들까지 등을 돌린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주님께 바치는 다섯 번째 고백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고발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마고로 미싸빕은 “사방에서 공포가!”를 뜻하는 말마디로 예레미야가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와중에서 터져 나오는 예레미야의 하느님 찬양과 구원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랑하는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는 오늘 독서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 말씀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들어도 감동스럽게 마음에 와 닿는 고백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20,9)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예표처럼 생각됩니다. 끊임없이, 참 집요하고 끈질기게 따라 붙어 예수님을 괴롭히고 공격하는 유다인들입니다. 제자들은 어디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 혼자서 계속 겪는 고난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신원이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늘봄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음은 아버지와의 상호내주相互內住의 깊은 내적 일치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그리하여 눈밝은 많은 이들은 이런 예수님이 일으킨 무수한 표징을 알아보고 피신중인 예수님을 찾아와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백하며 예수님을 믿습니다.
참으로 예나 이제나 우리와 함께 한결같이 늘봄의 삶을 사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중에 우리 또한 한결같이 늘봄의 정주생활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해 주십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