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1.성주간 월요일 이사42,1-7 요한12,1-11
우리는 주님의 종이다
-사랑의 관상가-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일 잘 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의 지상에서 천상의 삶을,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사랑의 관상가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말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여기서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지칭하지만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주님의 종이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뿐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이런 주님의 종이니 주님의 종처럼 품위있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성주간 월요일 복음의 주인공은 단연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묵상하는 순간 떠오른 21년전 이맘때 쯤의 민들레꽃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여전히 봄철되면 피고 지는 샛노란 민들레꽃들이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는지 무수히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이때는 본원 숙소 건물이 신축이전이라 숙소 창밖 뒷마당에는 봄철되면 민들레꽃들이 땅을 덮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연수시 영역한 이 시를 보고 격찬한 영어 교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주님의 종이며 사랑의 관상가입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가, 복음의 예수님이,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이사야가 이런 매력적인 사랑의 관상가 모습을 잘 묘사합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대로 섬세하고 자상하며 자비로운 관상적 활동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심전심, 유유상종입니다. 이런 주님을 직감적으로 알아보고 내심 따르며 흠모하고 사랑과 신뢰를 다했을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생각할 때 즉시 떠오르는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십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싶다”-1998.12.25.
24년전 성탄절 수녀님으로로부터 빨간 칸나 한묶음을 선물 받았을 때 즉흥적으로 읊었던 시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직감한 마리아가 예수님께 아낌없이 사랑의 봉헌을 한 행위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었습니다. 다음 장면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이런 사랑의 봉헌에 감격하지 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향유의 향기는 그대로 마리아의 존재의 향기, 영혼의 향기, 사랑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참으로 이런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지요. 예수님도 마리아도, 여기 참석한 이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한 오늘 우리에게도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런 사랑의 추억이 살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앞두고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을 것이며 마리아 또한 평생 이날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를 탓하는 현실적 물질주의자 유다의 반응이 참 실망스럽습니다. 일면 타당한 듯 하지만 사랑 없음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직제자이면서 예수님의 심정을 너무 몰랐습니다. 유다의 반응에 이어 마리아를 두둔하는 예수님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주겠는지요? 과연 내 견해는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바로 우리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회개하게 합니다. 사랑의 분별이요,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마리아와 유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주님 장례 날을 배려한 사랑이라면 마지막 사랑의 봉헌, 향유의 봉헌이 맞는 것입니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결정적 봉헌의 때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만이 주님의 종을 알아봅니다. 그 많은 이들중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사랑을 지닌 이는 마리아뿐이었습니다. 참으로 평생 한 번뿐인 봉헌의 때를 알아 향유를, 자기의 전 존재를 사랑으로 봉헌한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마리아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우리의 주님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마리아의 사랑의 봉헌입니다. 봉헌의 축복,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마리아처럼 우리의 전존재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합시다. 오늘 시편 화답송은 주님의 종 예수님은 물론 마리아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14ㄴ).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