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임종어臨終語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2022.4.15.주님 수난 성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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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5.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사52,13-53,12 히브4,14-16;5,7-9 요한18,1-19,42

 

 

 

예수님의 임종어臨終語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

 

 

 

오늘은 성삼일 두 번째 날,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우리는 방금 요한복음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우리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갖가지 수난과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큰 힘과 위로가,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도 우리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죽음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우리 죽음도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생미사와 연미사 신청이 반반입니다. 많은 분들이 세상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빕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힘든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주님의 은총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선종의 죽음보다는 안타까운 무의미하고 억울한 죽음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어제 받은 카톡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죽음병이 번져가고 있어요. 소통이 막혀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탓입니다.” 라는 일부 내용도 충격이었습니다.

 

누구나 소망하는 바,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잘 죽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소관이지만 역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하루하루 깨어 일상에 최선을 다하고 충실하며 내공을 쌓아갈 때 선종의 은총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으로 직결됩니다. 

 

바로 그 좋은 처방이 묘비명이나 임종어를 미리 준비해두면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제가 어느 묘지든 방문하면 우선 확인하는 것이 묘비명인데 묘비명이 없는 많은 성인들의 임종어나 불교 고승들의 열반송涅槃頌을 살펴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두 성녀의 임종어입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녀 소화데레사의 임종어입니다.

“보라, 신랑이 오신다. 어서들 마중나가자.”

바로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입니다.

 

성서중 특히 시편을 보면 임종어겸 좌우명으로 삼을 귀한 성구도 참 많습니다. 

날마다 죽음을 준비하며 죽음을 통해 삶의 중심을 잡아 주는데, 진짜 삶을 살아가는데 이런 임종어의 묵상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예수님께 정해 드린 “늘봄”이란 호가 생각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봄꽃 만발한 늘봄의 파스카의 봄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늘봄 예수님처럼 오늘 예수님의 수난후 죽으시기전 임종어 셋도 감동적입니다. 

 

첫째,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는 사랑받는 제자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어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을 영원히 영적 어머니로 모시고 살라는 임종어입니다. 이에 앞서 예수님은 마리아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역시 아들이 상징하는 바 주님을 믿는 모든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러니 마리아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영적 어머니가 되고 우리는 마리아 성모님의 영적 자녀가 됩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말로 믿는 이들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곁에서 늘 함께 하셨던 분으로 말 그대로 신망애信望愛의 모범입니다. 성모님을 닮는 일이 바로 예수님을 닮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런 성모님을 한결같이 잘 모시고 살 때 저절로 선종의 은총일 것입니다. 바로 우리 역대 교황님들이 성모신심의 대가들임을 봅니다. 

 

특히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작금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얼마전 38차 해외 사목순례여정차 말타공화국을 방문했을 때도 방문전후 로마를 떠나기전 성모경당에서 성모님 이콘 앞에서 기도드리던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매 해외 사목순방 전후로 “꼭” 마리아 성모님께 인사드리며 도움을 청하는 참 겸손한 마리아 성모님의 영적 아드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둘째, “목마르다”

역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하는 주님의 임종어로 우리의 임종어로 삼아도 좋을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목말라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갈망渴望이 영적 삶의 원동력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바로 진리에 대한 갈망이요 목마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진리를 갈망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이요, 진리의 사람이 되고 참 사람이 됩니다. 역시 이런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 역시 평생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빌라도의 대화에서 예수님의 정체가 선명히 드럽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주님 말씀에 대한 빌라도의 뜬금없는 물음이 또 우리에겐 기막한 화두가 됩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진리에 눈먼 무지의 사람, 빌라도는 진리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 묻습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닮아 정화되고 성화될 때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수난기는 참 특이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분위기를 시종일관 주도하는 분위기입니다. 참으로 침착하고 평화로우며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평소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사셨는지 깨닫습니다. 다음 두 물음이 예수님의 신적 신원을 분명히 합니다.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거듭된 물음에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요.” 대답하자 거침없이 예수님 “나다” 대답하십니다. 바로 “나다”는 탈출기에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자신을 이런 신적존재와 일치시키는 진리의 사람, 예수님입니다. 또 하나 빌라도의 물음입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대답해도 알아듣질 못할 무지의 사람 빌라도이기에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정답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인용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대한 수녀님의 기막힌 답변입니다.

 

“나는 아무데로부터 오지 않았다!(I am from nowhere!)”

 

결국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이며 수녀님의 본향은 천상의 하느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인간인 우리들입니다. 

 

셋째, “다 이루어졌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최선을 다했다는 고백입니다. 아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참으로 예수님께서 100% 성공적 인생 광야 순례 여정을 마쳤음을 의미합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 넷째 노래가 이루어진 느낌입니다. 사실 초대교회신자들을 그렇게 믿고 이해했습니다. 들어 보십시오. 그대로 예수님의 수난의 삶에 대한 예언같습니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참으로 수난받은 주님의 종처럼 최선을 다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어둡고 혼란한 현실을 보면 예수님의 수난은 계속 현재진행형중이며 십자가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무지의 죄악으로 인한 전쟁이, 비극과 불행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힘을 냅시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제1독서가 주님의 종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한 것이라면 제2독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최고의 올바른 평가와 감사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의 위로와 격려의 금과옥조 말씀으로 오늘 강론을 끝맺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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