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원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2022.5.16.부활 제5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1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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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16.부활 제5주간 월요일                                                       사도14,5-18 요한14,21-26

 

 

 

우리의 신원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

 

 

 

요즘 지인들이 보내 주는 5월의 우리 나라 풍경은 신록과 다양한 꽃들로 어디나 아름답습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여기만

아름다운 자연에 사람이 아니라

거기도

아름다운 자연에 사람이네

어디나

하느님 계신 천국이네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아야 겠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늘 나라 천국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입니다. 제 수도영성생활에 참으로 지대한 영향을 준 토마스 머튼입니다. 1986년 수련기때 참으로 열광했던 분이며 이때 이분에 대한 책을 가장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아마 20세기 가톨릭 교회 수도승들중 최고의 영성가일 것입니다. 1968년 임종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인 토마스 머튼입니다. 그를 일컬어 말하곤 합니다.

 

“머튼은 카톨릭인이었으나, 가톨릭인이기보다는 크리스찬이었고, 크리스찬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인간이었다.” 

 

참으로 성숙된, 모두에게 열려 있던 참 사람 토마스 머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 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은 참 사람이 되는 공부는 우리의 평생공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2014년 안식년 때 산티아고 순례후 지금까지 강론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주제는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평생 여정이요, 믿음의 여정, 희망의 여정, 사랑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종의 여정, 자유의 여정, 섬김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귀가의 여정, 예닮의 여정등 끝없이 이어지는 무수한 명칭들입니다. 

 

그리하여 늘 점검해 보는 참으로 많이도 인용했던 말마디가 있습니다. 내 삶을 일일일생(一日一生), 아침 6시 일출로 부터 시작하여 오후 6시 일몰시 까지 하루로 압축한다면, 또 일년사계(一年四季)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압축한다면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오후 4시,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점검이 깨어,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 주님을 닮아 참나의 삶을 살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누구나의 내면 깊이의 근원적 소망은 이런 참삶에 대한 욕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의 구체적 신원은 무엇입니까?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는 우리의 평생신원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본질적 처방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선교사로서 충실히, 한결같이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로서의 롤모델이 오늘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사도행전 13장부터 오늘 14장까지 계속되는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에 대한 보도입니다. 이 두분의 지칠줄 모르는 선교열정이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선교사로 파견된 두 분은 키프로스, 안티오키아, 그리고 오늘은 이코니온에 이어 리스트라에서 선교가 소개됩니다.

 

선교의 대상은 무지無知한 사람들입니다. 이코니온에서 무지한 사람들은 사도들을 괴롭히고 죽이려 했고 사도들은 이를 피하면서 박해중에도 끊임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한결같이 계속되는 무지한 이들의 적대적 반응입니다. 참으로 무지가 얼마나 뿌리 깊은 인간의 고질적 질병인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는 무지한 인간 현실입니다. 

 

오늘 리스트라에서 바오로 사도의 앉은뱅이 치유후,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 오셨다.”는 군중들의 열광적 반응이 무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두 사도의 답이 참 통쾌합니다.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외관상 똑같은 사람이지만 내적으로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인지요!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여전히 길을 잃고 헛된 것을 추구하다 보니 유령같은 삶이요, 괴물이, 폐인이 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돌아 가는 회개뿐이요,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참으로 충실한 것이 무지에 대한 근본처방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과의 친교를, 사랑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교사로서의 활동에 앞서 주님의 제자직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내적 사랑의 관계가 선교활동의 원천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주님과의 친교에 그 답을 줍니다. 우선적으로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두차례 강조되는 내용이 대동소이 합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고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이들을 사랑하시고 이들에게 당신을 체험토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활동에 앞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의 준수로 주님은 물론 형제들과 우정의 사랑을 깊이 하는 것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다시 반복되는 계명 실천의 중요성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인 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얼마전 고백성사차 방문한 본당 사제와 일치된 내용도 있습니다. 이제는 수도자들은 물론이요 본당 사제들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수행자로 하느님만을 찾는 구도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도움이 되는 분이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영적 스승이 없다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영적 스승인 보호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주시며, 주님의 훌륭한 제자요 선교사로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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