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서 성령님! 성령을 받아라! -성령이 희망이자 답이다-2022.6.5.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 낮미사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0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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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5.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 낮미사 

사도2,1-11 1코린12,3ㄷ-7.12-13 요한20,19-23

 

 

 

오소서 성령님! 성령을 받아라!

-성령이 희망이자 답이다-

 

 

 

오늘 6월5일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자 환경의 날입니다. 주교회의 생태환경 위원회 위원장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는 환경의 날을 맞아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주제의 담화문을 통해,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답은 우리 인간의 자발적이자 적극적인 한결같은 응답의 노력이자 실천이요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방금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 주님,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에 이어지는 참 감미롭고 은혜로운 부속가인 성령송가를 노래했습니다.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도 은혜로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마침 성가책을 펼쳐 성령에 관한 성가를 모조리 살펴 봤습니다. 거의 모든 성가가 “오소서,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이요”로 시작되는 가사였습니다. 참좋은 최고의 선물이 성령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이 바로 희망이자 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시며 성령을 주십니다.

 

루카복음에서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대목(루카11,9-13)의 말미에서도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11,13)

 

루카 복음 사가에게 성령은 좋은 것, 하느님의 은혜 그 자체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길 좋아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특징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매일 강론을 보내달라 청하는 어느 겸손한 “성령의 사제”가 어제 보내 준 답글도 감동입니다. 이런 겸손 역시 성령의 선물입니다. 내용이 참 아름다워 소개합니다.

 

-“참행복은, 영원한 행복은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에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의 여정은 주님과의 우정을 쌓으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부님, 부활시기 막바지, 빛을 세상에 뿌려주시네요!-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리 함께 하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정말 “신의 한 수” 같은 성령의 선물들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역시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정말 살 줄 알면 행복이요 살 줄 몰라 불행이란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인간의 고질적 영적 질병인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이 궁극의 희망이자 답입니다. 어제 복음 나눔중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공동체적共同體的이라는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너와 함께 단수가 아니라 너희와 함께 복수입니다. 함께 모인 제자공동체에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은 이어,

“성령을 받아라!”

역시 함께 모인 제자공동체에 성령을 선물하십니다. 더불어의 여정에 더불어의 성령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로 현존하시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에 모인 당신 제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성령을 선물하십니다.

 

이제 응답의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 모두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우선 떠오른 “벽이 변하여 문으로”라는 말마디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기적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주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말씀을 근거로 몇가지 성령의 선물을 소개합니다.

 

첫째, 소통의 선물입니다.

바로 성령의 선물이 소통입니다. 소통의 반대가 불통입니다. 불통에서 모든 병도 생깁니다. 육신의 경우도 호흡기, 순환기, 소화기 등 모두가 잘 통해야 건강이지 막혀 불통일 때 온갖 병이듯 영혼도 공동체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오순절날 성령강림의 선물과 더불어 각양각색 불통의 사람들이 하나로 통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바벨탑 사건이후 불통으로 산산히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로 통하는 소통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숙원宿願 사업이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이뤄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며 인내해온 하느님이신지요!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말로 들으며 소통하니 참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제가 들은 이와 흡사한 두 예화도 생각납니다. 프랑스에 유학중인 어느 자매의 노모가 한동안 와서 딸과 함께 지내는데 프랑스말은 하나도 모르는 노모가 날마다 이웃집 프랑스 노인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하며 그 유학중인 자매에겐 영원한 불가사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느 형제가 노모를 모시고 인도를 순례하던중 힌두어를 하나도 모르는 자기 노모가 어는 힌두 노인의 사정이야기를 오랫동안 듣고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여 후에 물으니, 그 노모는 “얘, 그분도 나처럼 고생 많이 한 것 같더라.”라고 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분명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성령이 주신 소통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새삼 성령이, 순수한 마음이 모두가 통하는 만국의 보편 언어임은 제가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통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둘째, 일치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일치입니다. 일치의 반대는 분열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마음이 갈리는 내적 분열입니다. 공동체의 고질적 어려움도 내적분열입니다. 사실 대부분 공동체나 나라도 외부의 침입보다는 내적 분열과 부패로 망했습니다. 참으로 내적으로 다양성의 일치를 이룬 공동체는 아무리 약하고 작아도 누구도 다치지 못합니다. 

 

참 아름다운 것이 다양성의 일치와 조화입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평생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가 되어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로 일치를 이룬 주님의 공동체는 얼마나 견고하고 아름답겠는지요! 언젠가 자기 남편을 전우戰友라 하며 영적靈的 전우애戰友愛를 과시하던 자매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악마가 즐겨 하는 것이 이런 분열이라면 성령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일치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 바오로가 일치의 성령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공동체의 일치는 순전히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소 감사요 겸손입니다. 자랑할 것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은사를 주신 성령님임을 깨달으니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기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정주의 수도생활을 하면서 형제들을 통해 깨닫는 진리입니다. 

 

그 많은 좋은 장점과 업적을 냈어도 도대체 자랑하기는커녕 장점이나 업적도 모르거나 잊고 지내니 정말 이것이 놀라운 겸손입니다. 완전히 겸손이 생활화된 것이요 몸에 밴 것입니다. 제가 여기 수도형제들에게 배우는 것이 바로 이런 겸손입니다. 바로 이런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인 겸손이 공동체의 일치를 견고히 합니다. 

 

정말 무섭고 두려운 것이 분열입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얼마나 분열과 극단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인지요! 이념에, 종교에 중독되어 광신狂信이 되면 답이 없습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런 경우 진정 회개가 참 절실합니다. 바로 이런 분열을 치유할 최고의 처방은 겸허히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을 모시는 일뿐이겠습니다. 분열 상처의 힐링에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셋째, 평화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우선적 공동체적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평화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짧은 복음에 연거푸 두 번이나 나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니 평화에 뒤따른 기쁨의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이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당신 제자들처럼 주님의 “평화의 사도”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창세기의 창조로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하시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은총이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새삼 용서 역시 평화와 기쁨에 이어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듯 성령의 선물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것이, 성령께 나를 온전히 내 맡기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 지혜인지 깨닫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비울 때 존재의 빈터에 가득한 성령입니다. 텅빈 허무을 텅빈 충만으로 바꿔주는 성령의 사랑입니다.

 

제가 요즘 절실히 깨닫는 것이 삶은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요 선택이요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도, 생명도, 사랑도, 희망도, 행복도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과제요 선택이요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탓하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매일 선택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이런 선물을 기꺼이 선택하여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중의 지혜요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선물인 소통도, 일치도, 평화도 끊임없이 깨어 선택해 공부해야 하고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배움에 있어서 영원한 초보자이며, 훈련에서는 영원한 훈련병일 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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