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한 삶”-2022.6.9.연중 제10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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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9.연중 제10주간 목요일                                                        1열왕18,41-46 마태5,20ㄴ-26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한 삶”-

 

 

“부끄럽다.”

“두렵다.”

 

때로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 두려워할 줄 알아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뻔뻔한 무지한 지도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제 갑작스런 수녀님의 부음을 듣고 의아했습니다. 평소 건강해 보였던 82세 수녀님의 선종 소식이 궁금해 카톡으로 알아봤습니다. 선종하신 수녀님의 환히 웃는 사진과 전해온 메시지입니다.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5월말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선종하셨습니다.”

 

충격적인 짧은 메시지를 받고, 새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했습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모토요 좌우명으로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이 말씀대로, 하루하루 죽는 그날까지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없이 본질적 깊이의 투명하고 절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새 하늘 새 땅입니다. 

다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 마지막 연은 제가 날마다 꼭 붙잡고 사는 고백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이 시가 태어나기 올해로 만 10년입니다. 2012년 수도원 설립 25주년 기념 축제 때 낭송했던 시입니다. 10년 동안 참 많은 분들과 나눴고 면담고백성사때는 보속으로 읽도록 했을 때 많은 분들이 울었습니다. 뭔가 가슴 뭉클하는 감동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하게 살고 싶은 것은 하느님을 찾는 삶을 갈망하는 이들의 공통적 욕구일 것입니다. 

 

5월 성모성월도 아름다웠지만 6월 예수성심성월도 초록빛 생명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계절의 연속입니다. 어제 새벽 밤하늘도 유난히 청명했고 흡사 푸른 하늘의 흰구름이 푸른 바다에 섬처럼 생각되었으며 저절로 흘러나온 “하느님”이란 고백시입니다.

 

“언제나

 하느님 생각하며

 

 사랑하며

 보고 살라고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다

 

 구름은 섬

 푸른 하늘은 바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는 하늘을 보고

 

 하느님이 

 보고 싶으면 하늘을 보네

 

 늘봐도

 늘 좋고 새롭고 그리운 하느님이시다.”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니 떠올랐던 생각들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니 삶의 진실성, 단순성, 절박성에서 예수님과 엘리야가 서로 꼭 닮았습니다.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엘리야에게서 하느님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제로0” 허무일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 자기를 잃고, 희망을 잃고, 허무의 유령같은, 좀비같은 헛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추측컨데 예수님은 엘리야 예언자를 롤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합니다. 엘리야의 평생 삶이 참 진실하고 절박했습니다. 어제 카르멜 산에서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목숨을 건 싸움은, 기도는 얼마나 진실하고 절박했던지요! 오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뭄이 끝나고 폭포수같은 비가 내리기 까지 엘리야의 간절한 몸의 기도가 참 절박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제1독서 장면이 흡사 그림같이 선명합니다. 카르멜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고 자기 시종에게 바다쪽을 살펴보라고 지시합니다. 

 

엘리야는 무려 일곱 번을 바다쪽을 살펴보라고 지시하며 기도하다가 마침내 일곱 번째 시종의 반가운 답을 듣습니다.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그러는 동안 잠깐 사이에 하늘이 구름과 바람으로 캄캄해지더니 큰비가 내립니다. 

 

아, 얼마나 통쾌한 장면인지요! 엘리야의 목숨을 건 절박한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하느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한편 엘리야는 주님의 손이 자기에게 내리자 아합을 앞질러 이지르엘 입구까지 뛰어 갑니다. 주님께서 늘 엘리야와 함께 했음을 봅니다.

 

엘리야를 능가하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한 가르침입니다. 두분 다 늘 목숨을 건 참되고 절박한 삶으로 하느님을 감동시켰던 분들입니다. 다음 말씀이 어제 복음 내용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과는 다른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충실성, 더욱 절박한 충실성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첫 대당명제입니다. 외적인 살인 행위를 넘어 그 마음의 뿌리를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권위를 지니신 절박한 어투의 명령입니다. 살인의 근본뿌리인 간접살인과 같은 성냄을, 형제에 대한 “바보!” 또는 “멍청이!”라는 멸시에 찬 말을 없이하라 하십니다. 바로 이들의 뿌리인 마음부터 정화하라는 것입니다. 멸시나 차별이 간접 살인의 큰 죄입니다.

 

어제 순간 실수로 면도날에 손가락 살을 약간 베이자 피가 나왔습니다. 면도날에 살처럼, 면도날 같은 예리한 말들에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상처를 입는지요! 간접 살인과 같은 언어 폭력에 마음들이 받는 상처도 많을 것입니다. 이와 연관된 아침성무일도시 찬미가중 아름다운 두 연을 나눕니다.

 

“우리의 말씨삼가 곱게 다듬어, 모진말 안하도록 살펴주시며,

 우리네 눈길들을 고이다루어, 헛됨에 두눈감게 하여주소서.

 

 우리맘 속속들이 씻어주시어, 노하고 성낸마음 가라앉히고,

 멋대로 먹고마심 말게하시고, 우리맘 오만에서 구해주소서.”

 

이어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에 앞서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즉시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바치라는 말씀도, 또 재판에 넘겨지기전 고소한 자와 지체없이 타협하라는 말씀도 참 단순하고 절박하게 들립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회개는 물론 지혜롭게 분별하여 즉시 조치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지혜와 사랑에 기초한 지체없는 결단과 실천의 절박한 삶이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삶의 자세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마태 5장에서 7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구체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하루하루 당신 뜻을 실천하며 참되고 단순하고 절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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