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5.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열왕2,1.16-14 마태6,1-6.16-18
떠남의 여정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과 떠남-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시편31,25)
약간 부족하다 싶었는데 다들 잠든 새벽 숨겨진 밤시간, 다시 단비를 내려주시는 겸손하신 하느님이 고맙습니다. 하루하루의 오늘에 충실하면 내일은 걱정 안해도 됩니다. 오늘이 내일이기 때문이요,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할 것이요 다만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됩니다. 이래야 멋지고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수 있습니다.
어제의 만남이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무려 17년 역사를 지닌 코이노니아 자매회 모임입니다. 수도원이 어려움을 겪던 시기 태동한 수도원을 사랑하는 자매들의 작은 모임으로, 코로나로 제대로 모임을 갖지 못하다가 지난달에 이어 어제 모임을 가졌습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알차고 행복한 만남이었습니다. 대부분 며느리와 손주가 있는 할머니 연세지만 얼굴은 꽃처럼 예쁜 분들입니다. 그대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반영하는 얼굴들입니다. 오후 미사가 끝난후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니 참 보기 좋아 자주 눈길이 갑니다. 사진과 더불어 공동 카톡방에 향기로운 말을 남겼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예수성심을, 성모성심을 닮아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날로 품위와 예쁨을 더해 갑니다.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자매님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어 무려 25년전 여기 이 자리에서 이맘때쯤 쓴 개망초란 시도 나눴습니다. 요즘 곳곳에 피어나는 비록 환영 받지 못하는 꽃이지만 나름대로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어느 사이
훌쩍 큰 개망초들
사무친
그리움은
하얀꽃들로
피어나고
키를 훌쩍
자라게 했나 보다”-1997.6.6.
모든 것은 떠납니다. 한 때입니다. 만발했던 봄꽃들 자리에는 푸른 잎과 열매들이 한창이고 또 곳곳에 줄줄이 피어나는 꽃들입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납니다. 꽃처럼 폈다 꽃처럼 지듯, 잘 살다가 잘 떠날 때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바로 오늘 엘리야의 승천 장면이 바로 그러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떠남의 장면인지요! 참으로 하루하루 절박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았기에 이처럼 사필귀정의 승천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겐 영적승리의 표징이자 희망의 표징, 기쁨의 표징이 됩니다. 참으로 남은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누구보다 최대의 수혜자는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저와 빠코미오 원장처럼, 자연스럽게 이뤄진 ‘바튼 텃치 경기 인생’ 같습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마지막 엘리야의 승천에 따른 엘리사의 반응 장면도 참 아름답고 인상적입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보면서 외친다음 즉시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강 가에 섭니다. 겉옷을 잡고 강물을 치면서,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말하면서 엘리사가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집니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엘리야는 떠났지만 엘리사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신의 한 수’와도 같은 하느님 섭리의 손길이 참 오묘합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에녹의 승천이요 모세와 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의 승천 장면입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5,24). 에녹의 승천을 알리는 대목의 성구인데, 바로 토마스 머튼의 사제서품 상본에 있는 성구입니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오늘날 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신명34,5-6). 모세의 승천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이 길은 주님께 사랑받는 베네딕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다.”
바로 성 베네딕도의 사후 그의 제자가 환시중에 본 ‘성인의 방으로부터 하늘로 향한 양탄자가 깔려 있고, 수없이 많은 등불이 켜져있는 길’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천사의 대답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전설같은 대목이지만 우리에게는 희망과 기쁨의 표징입니다.
한결같이 잘 살았을 때 아름다운 승천의 떠남임을 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제기되는 절박한 물음입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운 삶을 살면 됩니다. 바로 어제에 이은 오늘의 산상설교의 참된 수행정신으로 살면됩니다.
어제는 여섯째 대당 명제에서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최종적으로 주님은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당신 소원이자 우리 삶의 궁극 목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이어지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참된 수행 생활의 원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유다인들은 물론 초대 교회 신자들의 전통적 수행인 자선,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로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의식한 위선자의 허영의 헛된 수행이 아니라, 누가 알아 주든 말든, 누가 보아 주든 말든 하느님께 중심을 둔 숨겨진 겸손한 수행을 간곡히 권하는 주님이십니다. 위선자들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그런 수행을 경계하실 때 마다 매번 후렴처럼 반복되는 말씀이 우리의 위선적 수행에 큰 경종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이어지는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에 대한 가르침은 모든 참된 수행생활의 원리입니다. 참으로 이런 정신으로 수행에 충실할 때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집착없는 초연하고 홀가분한 자유로운 삶이요, 멋지고 아름다운 떠남의 삶, 승천의 삶도 이뤄질 것입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참된 수행이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진짜 의로움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이미 타계한 불교의 성철 큰 스님이 극찬했던 대목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참으로 우리 수행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영성가들이 공감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참된 수행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감쪽같이 감춰진 수행이요, 이래야 겸손한 관상적 삶에 초연하고 아름다운 삶도, 떠남의 여정도 가능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된 수행자로 살게 하시며, 참 멋지고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