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26.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1열왕19,16ㄴ.19-21 갈라5,1.13-18 루카9,51-62
참제자의 삶
-사랑, 이탈, 따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도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흥겹게 불렀던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다. 눞고 싶구나.”
석가모니의 마지막 임종 장면이다. 죽음은 내가 걸어가는 ‘저 모퉁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듯 나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김수영을 비판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김수영의 일상을 간과했던 탓이다. 김수영의 일상은 소민적 모양새였지만, 그것은 ‘살아돌아온 자’의 치열한 일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누군들 일상을 견디는 장사가 있으랴. 세상은 아주 조금씩만나아져 간다. 그래서 세월이 답답하고, 지난 자취는 흔적도 없이 잊혀가고, 먼지같은 개인은 늙고 시들고 사라져 간다. 이것이 남루하지만 숙연한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어제 읽은 대목입니다. 이 글을 쓴이는 황석영 작가이고 그는 김지하 시인이고 김수영은 그 유명한 ‘풀’의 시인입니다. 세분 다 대가大家의 반열에 드는 참 치열하게 산 분들입니다. 일상을 견디지 못해 변절이요 변질이요 부패요 속절없이 무너지는 삶입니다. 참으로 깨어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치열하게 절박하게 주님의 참제자답게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나 불암산의 옹달샘으로 머물으리라
확장도 개발도 홍보도
그 무슨 인위의 장식도 없이
자연 그대로의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님 안에 숨어 사는
옹달샘으로 나 머물으리라
목마른 이들에게 샘솟는 생명수가 되리라.”-1997.4.3.
치기稚氣어린 여기 이 자리에서의 25년전 고백이었지만 예나 이제나 끊임없이 샘솟는 “옹달샘의 영성”은 제가 희구希求하는 삶입니다. 이와 더불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의 영성” 역시 제가 희구하는 삶입니다. 엊그제 많은 비가 내린 후부터는 노래하며 맑게 흐르는 맑은 불암산 계곡물을 보며 산책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동요도 불러보며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따라 참제자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합니다. 긴 듯 하지만 짧은 인생이 흡사 인생휴가人生休暇처럼 생각됩니다. 10일간 휴가 떠났던 도반이 귀원했습니다. 출발할때는 긴 듯 했지만 금방이듯 인생휴가도 그러할 것입니다.
“집에 오니 참 편하다.”
얼핏 스치듯 순간 들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생휴가 참 치열하게 잘 살다가 본향집인 주님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 제자의 삶”입니다.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모든 교황님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제자의 모범입니다. 온전히 자기를 비운 주님 추종의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제자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한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오늘 제1독서중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에서도 우연같겠지만 엘리야는 첫눈에 엘리사의 내적 주님 사랑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하는 엘리사의 모습이 이를 증명합니다. 제1독서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엘리사는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파부침선破釜沈船의 결연한 자세를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파부침선은 밥짓는 가마솥을 부수고, 돌아갈 배도 가라앉히고 결사의 각오로 싸움터에 나서거나 최후의 결단을 내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대로 스승 엘리야에 대한 엘리사 제자의 신뢰와 사랑을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도상의 절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합니다만, 첫째는 에둘러 거절하고 둘째와 셋째는 당신의 제자로 택하시려 하는 데, 분명 이들의 당신 향한 사랑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둘째, 이탈離脫입니다.
억지로의 이탈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봤을 때,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선명할 때 저절로 이탈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이탈이, 버림이 뒤따릅니다. 이탈의 사랑, 이탈의 무욕, 이탈의 자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한결같이 이탈의 자유를 선택하여 종살이의 멍에에서 벗어날 것을 명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
과연 이런 정처없는 무집착의, 이탈의 삶을 살수 있겠느냐 에둘러 답변하며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의 청을 거절하는 주님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역시 일상사에 초연한 이탈의 삶을 명하시는 주님이시며,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그 목표임이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비전이 이탈의 동인動因임을 깨닫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셋째 경우 역시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며 당신을 따라 이탈의 초연한 삶을 살것을 명하시는 주님이시며, 역시 하느님 나라의 꿈과 비전이 이의 동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이 강렬할수록 자연스런 이탈의 삶임을 봅니다.
셋째, 따름입니다.
1.“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2.“나를 따라라.”
3.“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셋 다 주님을 따르겠다 하나 첫째는 에둘러 거절당했고, 둘째와 셋째는 지체없이 세상사에 연연하지 말고 당신만 보고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새삼 주님의 참제자로서의 삶은 “따름의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부단히 안팎으로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며 평생 주님을 따르는 여정입니다. 이에 대한 바오로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바로 따름의 여정의 내용을 보여 줍니다. 막연한 따름이 아니라 이탈을 통해 얻은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따름의 여정은 사랑의 섬김의 여정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고 유익하며 적절한 말씀인지요!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며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역시 따름의 여정에 귀한 영감을 제공합니다. 따름의 여정은 성령의 인도따른 여정임을 또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육의 욕망에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따라 주님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제자에게 따름의 여정은 사랑안에서 섬김의 여정임을, 성령의 인도에 따른 여정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살고 싶습니가?
주님의 참제자답게 사십시오. 참제자로 살아갈 때 참기쁨이며 참행복입니다. 사랑의 여정, 이탈의 여정, 따름의 여정의 삼위일체로 이뤄지는 참제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따라 자기를 비우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참제자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