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15.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1217-1274) 기념일
이사38,1-6.21-22.7-8 마태12,1-8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 마음
-기도와 사랑, 지혜-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오늘은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으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지혜는 한량없는 보물, 지혜를 얻은 이들은, 그 가르침이 주는 선물들의 추천으로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4)는 말씀이 참 좋았습니다.
엊그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어제는 참 청명한 날씨에 계곡물 흐르는 소리도 좋았습니다. 새벽에 잠깨어 문밖을 나서니 푸른 하늘에 휘영청 둥근달이 떠있었습니다. 엊그제가 보름임을 알았습니다. 예전 써놨던 ‘둥근달’이란 시가 떠올라 기뻤습니다.
“푸르른 밤 하늘
휘영청
밝은달 하나
온누리 환히 밝힌다
푸르른 고독이
휘영청
둥근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
푸르른 고독이!”-2001.2.11.
21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푸르른 하늘에 둥근 사랑, 둥근 달입니다. 바로 둥근 사랑, 둥근 마음, 둥근 삶이 지칭하는 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닮아갈수록 둥근 사랑, 둥근 마음, 둥근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제의 반가운 세 만남도 감사했습니다.
한분은 저를 좋아해서 죄송하다는 분인데 환한 모습으로 방문했고, 유익한 덕담도 나눴습니다. 이분에게 드렸던 메시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자매님은 축복받으셨습니다. 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 예수님을 좋아하는 마음이니까요! 예수님께서도 자매님을 참 많이 좋아하십니다! 저도 예수님 좋아하는 만큼 자매님 좋아하며 기도할게요. 좌우간 자매님은 하느님께 축복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될 것입니다. 저를 좋아했던 분들이 결국 모두 잘 되었거든요.”
끝기도때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전달했으니 성령의 선물입니다. 또 한 자매님이 참 오랜만에 두 자녀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남편 선종후 50일째 되는 날, 묘지에 들렸다 미사예물 봉헌차 방문했습니다. 참 힘든 살림에 힘껏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 온 분인데, 참 밝고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평화를 주신 것 같습니다. 남편도 참 편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하느님이 평화를 주신 것 같습니다.”
함께 방문한 두 자녀 역시 착하고 순수한 모습에서 “참 형제님 잘 살았구나!”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새삼 자비로운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값싼 은총은 결코 없습니다. 이 자매의 분투의 노력을 다한 삶의 결과 하느님 주신 평화의 선물이었습니다.
어제 피정한 도곡동 성물방 자매님들과의 만남도 좋았습니다. 고백성사를 본 한 자매는 스무살 딸과 중학교 3년 쌍둥이 아들을 뒀다는데, 결혼전 여기 수도원에서 피정하며 그때 저에게 고백성사도 봤고 써준 처방전 말씀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했습니다. 역시 이 자매님을 통해서도 주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느꼈습니다.
피정미사를 마치며 자매님들에게 마지막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오늘 미사와 강론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어머니 여러분! 모두 영원한 안식처이자 쉼터인 예수님을 닮아 여러분 가정의 ‘안식처’이자 ‘쉼터’가 되도록 하십시오.”
늘 예수님 안에 머물 때 예수님처럼 둥근 마음, 둥근 사랑, 둥근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편안한 쉼터가 될 수 있습니다. 분별의 지혜를 잘 발휘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판단이,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살아있는 현실의 사람이 분별의 잣대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직시하는 바 배고픈 제자들의 고단한 삶의 현실이었고 판단은 언제나 정확했습니다. 안식일 금지법은 예수님의 절대적 사랑의 법 앞에는 상대화될 뿐입니다. 안식일법을 어겼다며 항의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든 후 마지막 결론같은 예수님 답변이 참 통쾌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 마음은 하느님 마음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이 유일한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자비의 눈으로 보면 무엇을 행해야 할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당장 드러납니다. 아마 함께 했던 제자들은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런 분별의 사랑과 지혜를 보고 크게 깨닫고 배웠을 것입니다.
좋은 분별의 지혜를 지니기 위한 첩경의 길은 예수님을 닮는 길이요 답은 기도와 사랑, 지혜뿐입니다. 사랑은 허무에 대한 답이고 지혜는 무지에 대한 답이 됩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과 일치의 기도와 사랑을 통해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기에 이런 분별의 지혜였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히즈키야 임금의 발병과 치유과정이 은혜롭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 중병으로 인한 죽음을 선고받은 히즈키야의 즉각적인 간절한 기도입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고, 이어 이사야는 주님의 응답을 전합니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 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주님이 보여 주는 표징은 이것이다.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바로 진실하고 간절한 삶과 기도가 있어 이런 치유의 기적이요 응답입니다. 좌우간 히즈키야는 기도를 통한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성덕의 잣대는 사랑이요 분별의 잣대 역시 사랑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의 체험이 깊어질 때 영육의 치유에 올바른 분별력이요 성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성인을 만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뒤를 이었던 성 보나벤투라 주교학자입니다. “잘 왔도다”, “좋은 소식이로다”라는 보나벤투라(bona ventura)의 이름뜻도 기막힙니다. 13세기 파리 대학에서 함께 했던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와 쌍벽을 이루면서 참 좋은 보완관계에 있던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 학자입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설자로서 불후의 작품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썼으며 교회학자로 선포된 분으로 “세라핌 박사(The Seraphic Doctor)’로 불려질 정도로 경건하며 사랑이 넘쳤던 성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아 ‘분별력의 대가’였음이 분명합니다. 천사박사(Doctor Angelicus)라 칭하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선종한 해도 1274년 똑같습니다. 산 햇수는 성 보나벤투라가 57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입니다. 저는 두 성인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네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임종어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력의 지혜요,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당신을 닮아 사랑과 지혜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