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19.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미카7,14-15.18-20 마태12,46-50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공동체-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 깊고 풍부합니다. 공동체 일치의 원리, 다양성의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가정,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공동체,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은 예수님 안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개인이는 공동체든 그 “삶의 중심”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다양성의 일치를 위해 네 요소가 중요합니다. “1.삶의 중심, 2.삶의 의미, 3.삶의 목표, 4.삶의 방향” 넷입니다. 바로 믿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의 일치를 이뤄 살 수 있는 것은 이 네 요소가 분명할 때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파스카의 예수님이 네 요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삶이 혼란하고 복잡한 것은 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이 실종失踪됐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책을 본 소감을 수도형제와 나눴습니다. 책에 나오는 분들이 참 진지하고 의식이 있고 생각이 있는 분들인데 뭔가 결정적인 하나가 빠진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중심에 있는 정답을 찾지 못하고 웬지 모르게 중심 주변만 뱅뱅도는 느낌입니다. 중심에 있는 샘터를 발견하여 생수를 마시면 근원적 목마름은 일거에 해결될 터인데 말입니다.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안식처 파스카 예수님을!”
또 병은 없는데 늘 온몸이 아프다는 어느 수도형제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뚜렷한 병 없이 온몸이 아픈 것은 영혼이 중심을 잃었기에 온몸이, 온육신이 반란叛亂을 일으킨 결과라 봅니다.”
“삶의 방향이 사라져서 오는 무기력증이라고 심리학에서 말하더군요.”
참으로 영육의 온전한 건강을 위해 궁극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되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하느님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이는 제 수도공동체 체험을 통해서 늘 깨닫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며칠전 써놓은 ‘수도자修道者의 성소聖召’라는 고백의 글도 생각납니다.
“참 좋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연인戀人의 모습
부부夫婦의 모습
그러나
추호秋毫의 부러움은 없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일 거다
결혼結婚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이래서
수도자修道者의 성소聖召인가 보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참 다양한 수도형제들입니다. 일치를 이뤄 살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는,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수도복은 똑같지만 얼굴, 성격, 취향은 물론 모두가 다릅니다.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아침 식사후 자유시간의 모습을 봐도 다양함이 재미있습니다.
누구는 산책하고 있고, 누구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고, 누구는 쉬고 있고, 누구는 일하고 있고 참 다양합니다. 그래도 다 하느님, 예수님 중심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기에 다양성의 일치에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바람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 합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바람까지 없으면 숨막힐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분위기를 상쾌하게 만듭니다. 순수한 우리 말 ‘바람’과 ‘희망’이 일치됨이 참 신기했습니다. 삶의 중심인 살아 계신 주님으로 부터의 바람이, 희망이 공동체를 시원한, 상쾌한 천국 공동체로 만들어 줍니다. 이런 바람의 진원지는 바로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참으로 중심인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은 공동체에 시원한 주님의 바람, 주님의 희망이 됩니다.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수도공동체를 이뤄 하느님의 가정을 이뤄 살아가는 모습에서 저는 공동체의 신비에 늘 감격하곤 합니다. 정말 형제들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 같다는 생각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물보다 진한게 피이며 피보다 진한게 하느님 중심의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혈연血緣 공동체보다 무궁한 깊이의 신연神緣 공동체입니다.
이런저런 공동체에 관한 묵상후 오늘 복음을 살펴 봅니다.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제자가 밖에서 예수님 가족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을 때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결정적 답을 줍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 다음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참가족의 정체가, 하느님 가정의 정체가 환히 드러납니다. 삶의 중심인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좁게는 수도공동체, 교회공동체일 수 있고, 넓게는 세상 어디에 살든 인종에, 국적에, 종교에 상관 없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모든 진리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정에,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한가정을 이루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교회의 사람들에게 기도는 필수입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중심이신 주님과의 소통에 주님과는 물론, 형제들과의 날로 깊어가는 신뢰와 사랑의 우정 관계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미카서의 예루살렘의 기도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로써 미카서는 끝납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찬미가에 이어 용서와 자애를 청하는 참 아름답고 깊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고백한후 바치는 간절한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저희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가 바쳐도 좋을 기도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날마다 함께 바치는 공동미사전례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공동체는 물론, 하느님의 가정에 속한 세상 모든 이들과 일치를 이뤄 주시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