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30.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예레26,11-16.24 마태14,1-12
하느님 중심의 의인義人의 삶
-더불어(together), 반듯하고 한결같은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하느님 중심의 삶, 더불어(together), 반듯하고 한결같은 삶,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예언자들의 삶이, 의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제1독서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혼탁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특히 강조할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입니다. 사람은 섬같은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의 존재입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이점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늘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엊그제 소개했던 교황님 강론의 마지막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노인들이여, 조부모들과 손주들이여, 모두 함께 합시다. 우리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함께 우리 꿈꾸도록 합시다(Young and old, grandparents and grandchildren, all together. Let us move forward together, and together; Let us dream)”-
무려 ‘더불어(together)’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베네딕도 규칙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상적인 형제공동체를 위한 헌장과 같은 72장 11-12절 말씀도 생각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여기서 역시 강조되는바, ‘우리를 다 함께’입니다. 천국입장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라는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어느 한결같이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검사의 인터뷰 기사중 깨우침이 되는, 메모해둔 부분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내부 고발자들은 잘려 나간다. 내가 정말 다행인 건 내부 고발자로서 관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내가 조금만 말해도 돌아봐주고 들여다 봐주었다. 나는 정말 행복한 내부 고발자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느 한 출신들이 요직에 배치되고 있다.
“이카루스의 날개는 태양 가까이 다가가면 다 녹는다. 날개에 붙어 있던 깃털이 열기에 녹아서 밑바닥이 드러나면 국민들이 냉정하게 판단하시겠지. 길게 보려고 한다. 태양은 곧 정점 아닌가. 담담하게 일몰日沒을 준비할 거다.”
새삼 참으로 더불어의 삶이,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하느님 부끄러운 줄 아는 하느님 중심의 겸허한 삶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지 깨닫습니다. 엊그제 어느 딱한 분의 사정을 전해 듣고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기에 공동체 원장에게 자초지종 그 사연을 전했고 흔쾌하게 즉시 금전적 도움을 줬습니다. 새삼 공동체가, 공동체 원장의 지혜롭고 정의로운 결단에 감사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자 정의와 지혜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뒤 이어 그 형제가 힘든 사정을 전했습니다. 진정성 가득한 장문의 도움을 청하는 편지글이었습니다. 업친 대 덥친 격으로 가난한 이들은 병도 많습니다. 눈이 안좋아 황반병주사를 맞아야 실명失明하지 않는데 부득이 도움을 청하는 참 딱한 사연에 원장에게 역시 사연을 전했고 그 답변이 참 고마웠습니다.
“내일 아침 임원간담회에서 논의할 생각입니다.”
이래서 혼자는 못삽니다. 개인은 약해도 공동체는, 의로운 이들의 공동체는 강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뿌리내려야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겸손히, 정직하게 알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더불어 삶의 렌즈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복음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두 부류의 인간군상으로 확연이 구분됩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일당, 얼핏보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습니다. 한결같이 반듯한 하느님 중심의 정의의 삶을 살다가 삶의 중심이 없는 헤로데와 같은 부류의 악인들에게 희생된 세례자 요한이 외관상 참 외롭고 실패인생처럼 보입니다만 깊이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단기적 안목으로 보며 헤로데의 승리같지만 장기적 긴 하느님 안목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의 승리요 지금까지 의인으로 회자되어 영원히 기억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순교의 죽음으로 끝난 듯 하지만, 그의 영성은 그의 제자공동체를 통해, 또 예수님과 그분의 공동체를 통해 계승되고 살아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요한은 혼자가 아니라 그의 제자공동체에 뿌리 내리고 있었고, 또 예수님 공동체에 유대관계에 있었으니 결국은 세례자 요한의 승리, 예수님의 승리, 궁극에는 하느님의 승리로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한결같이 정의로운 하느님 중심의 삶이 빛납니다.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도 한결같이 정의롭고 당당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이 내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뜻은 공동체에 전달됐고 대신들과 백성들은 전적으로 예레미야 편에 서서 그를 도왔고 마침내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나니 결국은 의인 예레미야의 승리이자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마지막 해핀엔딩으로 끝나는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새삼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임을 깨닫습니다. 민심을 이기는 권력자들은 세상에 없습니다. 민심이 바다라면 위정자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배같습니다. 배를 띄우는 것도 바다이지만 배를 뒤엎는 것도 바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민심의 바다를, 하느님 바다를 두려워합니다. 성무일도중 제 좋아하는 계응송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 의義를 따라 걷게 하시고,
겸손한 자 당신 도道를 배우게 하시나이다.”(구 성무일도서 736쪽)
도의道義가, 도덕道德이 사라져 가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으로, 남을 속이려고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의 간신같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흡사 점차 의인들의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의 숲은 사라지고 잡목雜木 우거진 왜소矮小해진, 세속화世俗化된 고만고만한 작은 평균인平均人들이 야산野山을 이룬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더불어 반듯하고 한결같은 삶을 사는 의로운 이들은 이처럼 예수성심의 사랑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참 좋습니다.
“주여, 은혜로운 때에 당신께 비오니,
그 넓으신 자비, 진실된 사랑으로 나를 도우소서.”(시편69,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