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13.연중 제13주간 에제18,1-10ㄱ.13ㄴ.30-32 마태19,13-15
어린이를 사랑하라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의 어린이’입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어린이들을 보기 참 힘든 세상입니다. 어린이들을 보면 보물을 발견한 듯 신비한 느낌마져 듭니다. 어린이는커녕 젊은이들보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삼사십대 수녀들보기도, 아니 50대도 드뭅니다. 면담고백성사차 방문하는 분들, 거의가 60대입니다. 얼마나 노령화시대에 접어 들었는지 실감합니다.
예전 70년대, 50년전쯤에는 참 어린이들이 많았습니다. 70년대 중반 초등학교 교사시절, 제가 맡았던 서울 시내 한반 아이들은 보통 80-90명 이었습니다. 아마 20대 후반 8년간의 청년교사 시절, 이때가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이때만이라도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당시 저의 별명은 이스탈롯찌였습니다.
8년동안 매년 새학년 반을 맡으면 첫날 출석부를 들고 퇴근하여 1번부터 80-90번까지 아이들을 다 외워 다음날 부터는 어김없이 출석부 없이 순서대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저의 전부이지만 이때는 아이들이 저의 전부였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졸저의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이때 아이들은 내 첫사랑이자 내 삶의 전부였다. 이때의 일기장 25권이 치열했던 내 젊은날의 교편생활을 말해준다. 교편생활 8년 동안 당시에 그렇게 흔하던 촌지는 한푼도 받지 않았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면 도저히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게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이 우선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5월, 아카시아꽃 활짝 핀 창밖의 산을 보며 <과수원길> 노래를 부르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돈도 명예도 지위도 아닌 오직 하나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이었다.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보다 더 보람되고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정말 한눈 팔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내게는 아이들이 전부였기에 결혼은 안중에도 없었다“(졸저 175-177쪽 일부)
젊은시절 열정에 넘쳤던 치기稚氣넘친 내용이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50대 중후반에 걸쳐있는 제자들이지만 이때 제자들과 하나되어 지냈던 그리운 추억들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나이로 하면 청년 시절입니다.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기도해달라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만류하며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십니다(마태19,15). 그러나 마르코 복음은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10,16)’로 더 실감나게 예수님의 어린이 사랑을 표현합니다. 저 역시 정말 때로 강복을 주고 나면 사랑스런 마음에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아름답고 심오한 시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얼마나 깊고 멋진 잠언箴言같은 시인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여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누구보다 천진무구한 영혼의 예수님이셨기에 어린이들과 사랑의 소통에도 능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이들은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고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신축성도 좋습니다. 몸과 맘의 탄력도 좋습니다. 몸은 세월과 더불어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새로워 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무지개> 시를 쓴 영국의 계관 시인 윌리엄 워드워즈가 그런분입니다.
“저 하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어른인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그러하리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으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하루하루가
자연의 숭고함 속에 있기를”
과연 여러분도 무지개를 볼 때 마다, 또 자연이나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가슴 뛰는 감동의 동심이 있습니까? “아, 새롭다, 놀랍다, 좋다” 하는 감동이 있습니까?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의 동심에서 샘솟는 시詩들이요, 이래야 진정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어른이나 노인 누구에게나 마음 깊이에는 여전히 동심이 살아있고 속사람은 다 수도승修道僧이자 시인詩人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면담고백성사때 깨닫곤 합니다. 때로 보속으로 기도시祈禱詩나 강론을 소리내어 읽도록 하거나 성가를 소리내어 부르도록 합니다. 많은 경우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거나 목이 메어 중단하기도 합니다. 마음속 동심이 살아난 것입니다. 얼마전 피정지도시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로 이어지는 <바다>동요를 힘차게 부르던 60-70대 형제자매들을 보고 감동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진짜 어린이들은, 순수한 동심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을 꿈꾸며 과거에 살지 않고 지금 여기에 삽니다. 교회의 성인들이 그랬고, 성서의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시인이자 어린이이자 예언자인 에제키엘 예언자가 우리 모두 동심을 회복하여 참사람이 되어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살아라.”
끊임없는 회개가 답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살아나는 감동의 놀라움, 새로움, 좋음,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이요 순수와 열정입니다. 육신은 노쇠해도 영혼은, 마음은, 정신은 8월의 싱그러운 초록빛을 발하는 초목들처럼 하느님의 어린이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십시오. 나이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눈으로 깊이 들여다 보면 누구나 하느님의 어린이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도 노인도 어린이처럼 사랑합니다.
우리 천주교회는 이미 이런 회개의 시스템을, 힐링의 시스템을, 동심의 감동을 살려내는 시스템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사와 전례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여 한결같이, 끊임없이 고백성사, 성체성사에 충실하며 시편성무일도 및 개인기도나 묵상에 충실하면 다시 살아나는 동심의 감성이요 영적탄력좋은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삶은 은총이요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습관은 제2천성의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것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선택할 좋은 것들도 무궁무진하니 하루하루 날마다 좋으신 주님을, 회개를, 감사를, 기쁨을,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평화를, 행복을, 진리를, 좋음을, 아름다움을 선택하여 기쁘고 신나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영혼이 살고 육신도 살아 하느님의 영원한 어린이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어린이로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 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