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26.연중 제21주간 금요일(피정5일차) 1코린1,17-25 마태25,1-13
깨어 있어라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정적이고 순수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수녀회 피정지도는 많이 했지만 이렇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가 남자수도회, 특히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은 난생 처음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강론은 참 각별한 성격을 띌 것입니다. 제 은총의 발자취, 수도여정의 렉시오 디비나이자 고백이 될 것이며 또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 될 것입니다. 총원장 형제님과 나눈 카톡의 청담淸談의 대화가 이 강론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정적이고 순수한 수도공동체 형제님들의 젊고 힘차고 아름다운 시편공동전례기도에 힘과 감동을 받습니다. 피정분위기도 진지하고 열심하여 좋습니다! 공동체 힘껏 섬기시노라 수고많습니다.”
“벌써 내일 모레 피정이 끝나네요. 내일, 혹은 토요일 강론때 신부님 수도여정안에서 묻어나는 복음삼덕에 관련하여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젊은 수도자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될 듯 싶습니다.”
“아, 그것들은 이미 제1부, 체험적 고백의 강의에서 다 피력됐다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기도시, 내 수도생활관, 명상기도, 희망의 여정, 행복기도에 제 삶 모두가 담겨 있지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고 있으며,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유일한 소망이랍니다. 이에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이렇게 정다운 청담을 나눈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밤중 잠을 깨는 순간, 형제님의 청에 순종順從하여 제 수도여정을 나눠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것은 순전히 성령聖靈께서 제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도저히 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제 성소聖召는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천주교를 몰랐던 시골 어린 시절부터 결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늘 자리했습니다. 이때는 집근처의 감리교회에 다녔지만 그리 열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성소의 계기는 교대시절 여름방학 뇌종양 수술로 RNTC 훈련을 못받자 군에 1970년 징집되어 34개월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였습니다.
입대시 소지품은 절박한 마음에 지녔던 성경 한권뿐이었습니다. 군복무중 개신교 신자로 주일 예배는 꼭 참석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은총의 섭리안에 순탄한 군복무후 제대해 마지막 한 학기를 마치고, 1974년부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만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1981년까지 재직하다 1982년 왜관 수도회에 만 33세로 입회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치열하고 간절했던 초등학교 8년의 교편시절이었고 수도 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직을 돈벌이 직업職業이 아닌 성직聖職으로 생각하여 오로지 교육에, 아이들 사랑에 헌신하고자 했고, 결혼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바람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었기에 8년간 학부모가 건네주는 일체의 촌지寸志도 겸손히 사양했고, 온전히 날마다 하루 전부를 아이들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았습니다. 지금은 하느님 사랑이 전부이지만 당시는 교육과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향해 몸바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도 마음의 허기는, 공허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개신교에 다녔고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알았고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때로 목사님이 되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직업으로의 목사님 하기보다는 교사 직업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떳떳할 것이라 생각하고 거절했습니다. 정말 내 가정을 가지고 성직을 수행한다는 생각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서히 가톨릭에 끌리기 시작했고, 때로 미사에 슬며시 참석하기도 했는데 마음이 고향집에 온 듯 편안했습니다. 마음의 갈증도 허기도 해소되는 느낌이었고, 동료 가톨릭 교사들도 적극적으로 수도사제의 길을 권했습니다. 당시 만 33세에 안정된 교직을 그만두고 수도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모험이었습니다. 참으로 무모無謀하기에 일부는 권했지만 대부분 말렸습니다.
하느님의 성소에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산다해도 이길뿐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1980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고, 1981년 성탄절에 견진을 받고, 1982년초 사직辭職후 일사천리 수도회의 각별한 배려의 은총으로 입회가 가능했습니다. 이때 역시 본당신부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사무장님이 잘 아시는 수도회 성소 담당 신부님을 연결해 줬기에 막차를 탄 기분으로 고령의 나이로 입회가 가능했으니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어제와 동일하게 “깨어 있어라”인데 이때부터 하루하루, 참으로 치열히, 절실히 깨어 살도록 노력했습니다. 보통 자연스런 입회자들보다 14년은 늦었기에 배로 열심히 산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가톨릭 신학대 입학은 어려워 마침 수도자 신학교를 계획한 서강대 종교학과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막힌 섭리였습니다. 제가 입학한 후 더 이상 수도 신학생의 입학은 없었습니다. 마치 저를 위해 개설한 학과였던 듯 싶습니다.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신학, 철학, 종교학을 마치고 졸업하자 즉시 수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련기때는 토마스 머튼에 심취되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된 영문판 서적은 거의 읽었고, 나중 대학원 논문도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해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련을 마치자 특별한 배려로 대구가대 신학대학원 제1회에 맞춰 제일 많은 나이에 자연스럽게 편입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서강대 종교학과 학장이던 김승혜 교수 수녀님께, 대구가대 정하권 몬시뇰 학장님께 들었던 찬사도 큰 힘이 되었음을 지금도 생생히 고맙게 기억합니다.
"대단한 노력가다!"
대학원 2년간 교구 학생들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학부과목도 무려 12과목을 수강하라 하여 시험을 봤습니다. 참으로 치열히, 열심히 공부하여 만학晩學의 오르도ordo 첫 번째인 저를 의아해하던 주위의 시선이 첫학기 1등하자 깨끗이 사라졌고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대구가톨릭신학대학원에 자연스런 편입도 은총의 기적이었지만 종신서원을 앞두기 두 해전 1987년 성 요셉수도원의 설립도 저에게 기막힌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서강대를 마련해 주신 주님은, 자연스럽게 대구가대로 이끄셨고, 신학교 공부가 끝나자 마자 때에 맞춰 평소 갈망해왔던 관상적 성격의 요셉수도원을 마련하여 이끄셨던 것입니다. 제 일정표엔 없었지만 하느님 일정표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신학교 공부를 끝내고 유기서원 3년차 만39세, 1988년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으니 올해로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34년째요, 수도회 입회후 만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요셉 수도원 초창기 역시 참으로 생존生存을 위한 참 치열했던 삶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하기까지 무려 22년동안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우여곡절에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의 은총으로 무사히, 성공적으로 통과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1988년 7월11일 요셉수도원 부임전날 밤, 참 절박한 마음으로 왜관 수도원 대성전에서 밤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3천배 기도를 바쳤던 기억입니다. 성철 큰 스님의 좌우명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정신으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살아 온 그동안의 삶이었습니다.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치열하고 항구한 깨어있는 삶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유명한 제 모토가 생각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참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수도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날로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저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지면서, 제 수도여정을 렉시오 디비나 하였고, 이어 훌륭한 원장 후임자를 마련해 주신 ‘신神의 한 수手’ 같은 하느님의 섭리에 정말 감격, 감탄하였습니다. 저절로 모두가 은총이란 고백과 더불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도 날로 깊어지게 됩니다.
2014년 원장직에서 내려온후 오늘까지 평범한 수도승으로서 수도형제들과 34년째 정주중입니다. 우리 나이로 40세 부임하여 34년이 지나니 현재 74세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될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환상이나 거품을 거둬내고 깨어 본질적 깊이의 종말론적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날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해가면서 저절로 깨어 살게 되며 주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됩니다. 결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처럼 문을 두드렸을 때 주님의 다음 말씀은 듣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과 신뢰를 받았더라면,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처럼 섬김과 사랑, 겸손을 위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상시 영혼의 등잔에 주님 향한 신망애信望愛와 진선미眞善美의 영적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여 늘 환한 등불 환히 켜들고 깨어 주님을 기다렸다면, 하늘 나라 잔치에 너끈히 입장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깨어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들고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을 맞이하여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를 앞당겨 체험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깨어,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