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2.연중 제22주간 금요일 1코린4,1-5 루카5,33-39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기
-꼰대가 되지 맙시다-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37,5-6)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새것과 헌 것”을 주제로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예수님께 시비를 걸 듯 이의를 제기하는 참 고루해보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순간 “꼰대”라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꼰대가 될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젊은 꼰대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꼰대와 멘토,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야말로 영원한 멘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봤습니다.
꼰대 6하 원칙에 의하면 꼰대는 “1.내가 누군 줄 알아? 2.네가 뭘 안다고, 3.어디 감히, 4.왕년에, 우리 나이 때엔, 5.어떻게 나한테, 6.내가 그걸 왜?” 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자라합니다. 꼰대 방지 10계명도 재미있습니다.
1.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2.“고맙다” “수고했다” 고 자주 말하라.
3.오만하지 마라.
4.칭찬에 인색하지 마라.
5.능동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라.
6.강요, 협박등 강압적 태도를 자제하라.
7.매사 솔선수범하라.
8.젊은 세대의 문화에 민감하라.
9.자기계발에 힘쓰라.
10.진짜 꼰대가 되라. 진짜 꼰대는 본인의 뚜렷한 소신과 철학이 저절로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이다.
참 재미있습니다. 어제는 참 귀한 자매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짐이 되는 선물은 사양하는 편이지만 어제의 원숙한 노년의 요셉 성인상 그림은 고맙게 받았습니다. 하루 2-3시간, 6개월 걸려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에 놀랐습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자비하신 노년의 아버지 모습의 렘브란트 그림과 짝을 이루는 성 요셉의 그림에, “아, 나도 이제 자비하신 할아버지 나이에 도달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림의 이런 자비로운 노년의 어른들을 두고 꼰대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제부터 10월4일까지의 창조시기 바치기 시작한 기도문도 참 좋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시의적절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섬세한 조치에 다시 감탄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톨릭의 힘이며 자랑일 것입니다. 철저한 생태적 회개를 바탕한 고백은 물론이고 다음 부분만 잘 명심하여 기도를 바치면 꼰대 예방에도 좋겠다 싶어 인용합니다. 참고로 어제 피조물의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주제는 “피조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였습니다.
“올해 창조시기에 청하오니,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처럼, 꺼지지 않는 주님 성령의 불로 저희를 불러 주소서. 저희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소서. 저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자기 내면만 향하던 시선을 돌리게 하소서. 주님의 피조물을 관상하고,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각 피조물의 목소리를 듣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이 거룩한 땅을 조심스럽게 걷는 법을 배우는 저희를 주님의 은총으로 비추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한마디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학인이, 주님의 형제가 되어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며 겸손히 배워 실천하면서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꼰대로 부터의 탈출이 가능하겠습니다. 꼰대가 아닌 꽃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예수님이자 바오로 사도입니다.
꼰대에 버금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이의 제기에 주님은 흥분하지 않고 이들의 무분별의 무지를 일깨우십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로 단식의 때 단식하라는 충고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계율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축제의 때, 왜 축제인생을 자초하여 고해인생으로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새것과 헌것의 비유를 통해 아주 알기쉽게 설명하십니다.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헌옷에 새 천조각을 꿰매는, 헌 가죽 부대에 새포도주를 담는 어리석은 꼰대 짓으로 매사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 늘 깨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도록 새 부대의 마음으로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새삼 노년의 지혜에 해당한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고,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조언도 생각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마음의 부대가 되도록 깨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이 종래의 관행에 익숙해진 우리의 보수적인 집착의 경향이 얼마나 바꾸기 힘든지, 그리하여 꼰대의 처지를 이해해야 함을 또 배우게 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무시할 수 없는 인간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새 부대의 마음으로 새 포도주의 현실을 받아 들이려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이런 겸손한 노년의 분들은 저절로 젊은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새삼 꼰대는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가 87세 노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꼰대라고 하겠는지요! 교황님의 정신의 젊음, 마음의 젊음은 어느 젊은이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정신 역시 복음의 예수님처럼 젊고 자유롭고 당당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늘 주님 앞에서, 그 책임을 다한 결과의 확신일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나도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늘 주님 앞에서, 세상 잣대가 아닌 주님 사랑의 잣대로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유로운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였을까?”가 참 좋은 분별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런 분별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시편37;27,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