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여정 -기도밖엔 길이 없다-2022.9.6.연중 제23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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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6.연중 제23주간 화요일                                                            1코린6,1-11 루카6,12-19

 

 

 

기도의 여정

-기도밖엔 길이 없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한 수도형제의 선종시 상본 성구도 참 좋습니다. 제가 자주 부르는 짧은 성구 노래입니다. 이제는 개의치 않고 일기쓰듯 강론을 씁니다. 하루하루 특기할 만한 뜻 깊은 내용을 담고 싶습니다. 참 많이도 쓴 강론입니다. 1989년 7월11일 사제 서품이후 날마다 바치는 미사에 거의 매일 쓴 강론입니다. 하루하루 말 그대로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아 온 나날이었고 남은 노년의 삶도 이러하길 소망所望합니다. 

 

9월6일 밤12:30분 종전대로 기상하니 불암산 계곡물 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한국을 관통하고 있는 “힌남노” 대형 태풍으로 인한 폭우로 인한 결과입니다. 어제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지금도 계속 내립니다. 인터넷 뉴스 1면도 흰남노 태풍에 대한 보도입니다. 

 

대단히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어제처럼 비오는 날은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좋습니다. 저녁식사때도 창밖 숲속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때 그대로 생음악을 듣는 듯 마음 가득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바라봄의 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둘만의 긴 대화가 필요하다.

하늘과 땅

멀리서 보기만 했지

못다한 이야기들 너무 많았다.

 

하루종일

두런두런 소리내며

내리는 비

나눠도 나눠도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

하늘과 땅의 정다운 대화

사랑의 일치!

 

아, 때로 나누고 싶어라

사랑하는 임과의 끝없는 대화를!”-2001.7.5.

 

21년전 시가 떠올랐습니다. 이때만 해도 오늘같은 기후위기, 기후변화, 기후재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후대폰도, 인텃넷도 없어 강론은 전부 손으로 썼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의 변화는 정말 혁명적입니다. 어제 또 특기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재능과 사랑 많은 수도형제가 2009년 제 환갑때 기념으로 만들어 준 동영상을, 오래 잊고 지내다 어제 지인이 보내 주어 다시 보니 감동이었습니다. 

 

당시는 원장직에 사제는 저 혼자라 참 여유없이 지내다 보니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어제서야 자세히 보고 그 정교한 배치와 내용에 감탄했습니다. 마치 제 수도생활의 축약본을 대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니 지인이 보내준 동영상을 통해서 13년만에 제대로 끝까지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사랑하는 많은 친지들과 선물처럼 나눴습니다.

 

또 새삼스러운 놀라움은 제가 2009년 2월9일 환갑날로부터 2022년 오늘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강론을 썼고 매일 미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휴가든 회의든 해외 여행중이든 심지어는 산티아고 순례 때도 매일 미사에 강론을 했다는 것입니다. 흡사 그 긴 날들이 “하루의 영원”에 수렴되는 듯한 느낌에 스스로 전율했고 감동했습니다. 어제는 얼마전 수도형제들 모두가 찍은 영정사진과 더불어 선종상본 성구도 생각났고 문득 제 미래의 장례미사도 생각났습니다.

 

장례미사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성가402장)로, 퇴장성가는 “오! 감미로워라”(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로 불러 줄 것을, 또 강론 대신 어제 나눈 “환갑동영상”과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를 나눠달라 부탁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은총으로 충만했던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이런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결코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요, 항구히 한결같이 바친 기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기도의 여정-기도밖엔 길이 없다-”로 정했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제 졸저 제목과 더불어 “기도밖엔 길이 없었네” 말마디도 그대로 통한다 싶었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기도할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는, 사랑이 되어가는 존재론적 변화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뚜렷이 부각되는 바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매일 밤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깊은 일치의 관상적 친교의 기도를 바치셨고 중대한 일이 있을 때 마다 밤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참으로 아버지와의 일치의 기도가 예수님의 자비와 지혜, 활동의 원천原泉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모든 성인성녀들이 그러했고 기도를 주업으로 하는 여기 수도승들이 또한 그러합니다. 

 

사실 예수님이나 성녀들, 우리 수도승들의 삶에서 하느님을, 기도를 빼버리면 완전 제로의 허무와 무지의 어둠만 남을 것입니다.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실 이렇게 영혼없이, 생각없이 탐욕에 노예되어 진아眞我가 아닌 가아假我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어 예수님은 열두사도를 뽑으시는데 참 오색찬란 다양하고 어찌보면 엘리트 공동체라기 보다는 오합지졸의 공동체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 한몸 추스르기도 버거워하는데 늘 동고동락할 제자이자 사도 열둘을 뽑으시니 예수님의 열성과 정력, 리더십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불가의 고승들이 숱한 제자를 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요즘은 이런 고승들도 거의 사라져 가고 사찰의 제도로 대치된 듯 합니다. 아름드린 거목巨木의 총림叢林의 고승들보다는 야산野山같은 공동체에 잡목雜木우거진 숲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불교나 천주교나 대동소이한 현실일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밤샘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최선의 선택일텐데,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끈 배신자가 된 유다 이르카리옷이 뽑혔다는 사실이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신비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 생각과 하느님 생각의 차이일 것입니다. 나름대로 분명 “신의 한 수”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합지졸같은 제 수도원만 봐도 담박 알아챌 수 있습니다. 정말 성소의 신비, 성소의 은총입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이처럼 다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내 귀한 성소요, 부단히 가꾸고 돌봐야 할 성소입니다.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평생 우리의 협조로 완성해 가야할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수도공동체가 “살아 있는 보물창고”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세상의 쓰레기장” 같다는 불경不敬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어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이었는데,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됩니다. 말씀 선포에 이어 치유이적, 구마이적이니 이 모두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대목의 묘사가 너무 생생합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뿐이 길이 없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사랑의 여정은 동시에 기도의 여정이 됩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삶에 한결같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6,11).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이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는 우리가 매일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참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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