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8.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미카5,1-4ㄱ 마태1,1-16.18-23
하느님 닮기를 위한 영적 훈련
-사랑, 경청, 관조, 겸손-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님, 복되니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이다.”(복음 환호송)
흡사 성모님을 닮은 우리 어머니들의 탄생 축일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돌아가셨든 살아 계시든 상관없이 오늘은 우리 모든 어머니들의 생신날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성모님인 모든 고통중인 우리 어머니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이 참 반갑고 기쁜, 각별한 느낌이 듭니다. 작년 12월8일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후 만 9월만에 탄생하신 마리아를 기리는, 참 기분 좋은 성모님 탄생 축일입니다.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 그리고 탄생 축일을 지내는 분은 성모님뿐입니다.
오늘 축일을 참으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분명히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마리아가 잉태된 순간부터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고, 평생 동안 자유로웠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죄로 더러워진 몸으로 잉태된다는 것은 교회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니 이 또한 교회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교회는 이미 7월26일 축일을 지내는 요아킴과 안나라는 부모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와 로마의 서방교회는 6세기와 7세기부터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해 왔습니다. 전례는 6세기 성 안나 대성당으로 알려진 예루살렘 교회의 봉헌으로 그 기원을 추적합니다. 그 이전에는 요아킴과 안나의 집으로 추정되는 ‘양치기의 들판’으로 알려진 장소에 마리아를 기리는 5세기 대성전이 있었습니다. 그 성전은 성녀 안나에게 봉헌된 6세기에 새로운 대성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동방의 수도승들은 7세기에 로마에 축제를 가져왔고, 이어 서방교회에 퍼지게 됩니다. 13세기에는 장엄한 8부 축제와 금식일인 철야로 엄숙하게 격상되었고,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는 축제를 위해 포로 로마나에서 성모 마리아 대성전까지 행렬을 마련했습니다.
교황 성 비오 10세의 전례 개혁에 따라 축일에는 단순한 8부 축제만 있다가, 1955년 교황 비오 12세는 8부를 완전히 폐지했고, 이제 전례는 축일의 등급을 갖게 됩니다. 동방교회에서 마리아의 탄생은 12대 전례중 하나로 거행되며, 축일은 ‘하느님을 낳으시고 영원히 동정이 되시는 마리아의 높으신 모후의 탄생’으로 명명합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축일의 유래를 살펴봤습니다. 교회의 전례가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지 새삼 경탄하게 됩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일반 알현 시간에 성모님 탄생 축일을 앞두고 모든 어머니들을 위해, 특히 아이들로 인해 다양하게 고통받는 어머니들이 성모님과 하나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특히 교황님은 세계 곳곳에 있을 고통받는 어머니들과 가까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선교와 일치된 ‘어머니’로써, 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 ‘딸’로써 몸소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체험하셨다.”
참으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cloness)’과 ‘부드러움(tenderness)’의 두 특성을 지니신 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셨던 마리아 성모님은 본능적으로 기쁘게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과 부드러움을 평생 훈련하시며 살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영성생활에 영적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어제 ‘행복은 선택이요 발견이자 은총이다’라고 강론 제목을 했다가 아침식사중에 벼락같이 ‘훈련’이란 말마디가 떠올라 즉시 ‘훈련’을 추가하여 ‘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이다’로 정정하니 마음이 참 개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성생활은 영적훈련입니다. 어제 수녀님과 면담 고백성사시 한없이 강조한 영적훈련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영적 훈련에 평생 영적 훈련병이란 수도자의 신분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영적훈련이 없어 무기력, 무감각, 무의욕으로 인해 내외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삶인 것입니다.
도대체 영적 훈련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도 회개도 찬미도 감사도 기쁨도 행복도 사랑도 겸손도 경청도 관조도 가까이 있음도 부드러움도 모든 수행이 사랑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저 역시 사랑도 훈련이란 깨달음에 매일 강론 쓰기는 물론이고 요즘 모든 편지 성격을 띠는 모든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마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반드시 “사랑하는”이란 말마디를 이름 앞에 붙입니다. 사소한 경우라도 사랑의 훈련이란 생각으로 아름다운 동영상이나 사진, 그리고 섬세한 문자 메시지를 선물로 보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겸손을 배우며 훈련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닮아 평생 사랑과 겸손, 침묵과 관조, 경청과 순종의 영적 훈련에 전념했을 마리아 성모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제1독서의 미카 예언자 역시 겸손의 영적 훈련에 달인이셨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미카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겸손한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이미 아득한 그 옛날 마리아를 통해 구세주 예수님 탄생이 예고됩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참으로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은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작고 가난한 겸손한 이들을 통해 묵묵히 일하심을 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삶의 스타일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를 보십시오. 하느님께는 버리실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별별 사람들 모두가 구원 역사에 한몫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눈엔 모두가 소중하며 가난하고 겸손하고 약한 이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다말, 라합, 룻, 바쎄바, 구약의 기구한 팔자의 네 여인들이지만 참으로 눈밝은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은 이들을 당신 섭리의 귀한 일꾼들로 삼으시고, 마치내 신약의 마리아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 탄생때까지 그 오랜 세월 묵묵히 기다리신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한 사랑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겸손과 인내의 사랑을 배우며 훈련하는 것이 바로 영적 훈련의 핵심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
이어 마리아의 천생 연분, 의로운 요셉을 통해 그의 지극한 겸손과 인내의 사랑에 대해 또 감격하게 됩니다. 영적훈련의 대가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우리의 영성생활에 영원한 멘토로 삼아야 할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들인 성 마리아와 성 요셉 부부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주님의 영원한 영적 훈련병인, 또 하나의 예수님들인 우리들 역시 영예스럽게도 또 하나의 이름이 수여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뜻의 ‘임마누엘’입니다. 정말 우리 모두 임마누엘답게 평생 겸손한 사랑의 영적 훈련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대로 이 아름답고 거룩하고 경건한 마리아 요셉 부부를 통해서 구세주 탄생이란 미카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예언이 실현되었고 우리는 착한 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라.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바로 우리의 평화이신 착한 목자,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평생 주님의 ‘평화의 전사’가 되어 오늘 탄생하신 마리아 성모님과 함께 영적 훈련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침성무일도시 아름답고 풍부한 즈카르야 노래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천주의 성모 동정녀여,
당신의 탄생은 온 세상에 큰 기쁨을 전하였나이다.
당신은 정의의 태양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낳으셨으니,
그분은 저주를 풀으시어 축복을 주시고,
죽음을 물리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