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참으로 살 수 있을까요? -꿈, 찬양, 기억, 사랑-2022.9.10.토요일 한가위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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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10.토요일 한가위                                 요엘2,22-24.26ㄱㄴㄷ 묵시14,13-16 루카12,15-21

 

 

 

어떻게 참으로 살 수 있을까요?

-꿈, 찬양, 기억, 사랑-

 

 

 

“뿌릴 씨를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단 안고 환호하며 돌어오리라.”(시편126.8)

 

이번 추석은 참 행복했고 의미 깊게 생각됩니다. 뜻밖에 많은 고마운, 사랑하는 지인들에게 추석선물로 두개의 동영상을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10년이 지나서야 진가를 발견한 동영상의 선물입니다. 

 

하나는 요셉수도원과 역사를 함께한 13년전 제 60세 환갑기념 동영상이고 하나는 10년전 요셉수도원 설립25주년 기념 감사제 행사시 정원에서 있었던 작은 음악회때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와 수녀복장을 한 우리 수사님들의 율동을 곁들인 노래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 낭독에 전율했다는 반응이었고, 당시 수녀복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는 수사님들 모습에 얼마나 웃었는지 아마 이런 구경은 다시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바로 최원장 수사님이 제작 편집한 2개의 동영상을 추석 선물로 보냈고 반응도 좋았습니다. 저역시 앞으로도 가끔 보며 정체성을 새롭게 할 수 있겠습니다.

 

“신부님, 훌륭한 앨범 반갑게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요셉수도원의 살아 있는 역사이십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은총의 여정 되시길 빕니다. 신부님, 한가위 명절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수도원의 역사이신 신부님! 동영상을 보니 가슴 뭉클합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시길, 항상 기도드립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 지내셔요.”

 

메시지가 고맙고 새삼 수도원의 살아 있는 역사가 되어 힌결같이 잘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요즘 만나는 분마다 양상은 다르지만 다 힘든 환경속에서도 믿음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분들로부터 참 많이 배우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입니다. 수도자들이 수도원에 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 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인간의 본래 모습에 대한 오직 한 문장, 아니 오직 한마디로만 표현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처럼 완전해야, 거룩해야, 자비로워야 합니다. 저절로 어떻게 이렇게 참으로 살 수 있겠나? 자문하게 되며 그대로 오늘 한가위 추석날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첫째, 꿈입니다.

꿈이자 비전, 희망입니다. 셋인 듯 하나 결국은 하나입니다.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고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꿈만은, 비전만은, 희망만은 늘 생생해야 합니다. 이들이야 말로 살게 하는 힘이요, 안주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고,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역동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복음의 주인공 어리석은 부자는 이런 꿈이, 비전이, 희망이 전무했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꿈은, 비전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답은 하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궁극의 꿈이자 비전, 희망은 하느님 하나뿐입니다. 오늘 한가위 추석 미사시 아름다운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후렴이 한결같이 하느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입증합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제1독서 요엘 예언서의 말씀도 퍽이나 흥겹고 고무적입니다. 바로 오늘 가을철 한가위 추석에도 잘 어울립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타작 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참으로 창조시기(9.1-10.4)에 바치는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가,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가, 구체적으로 ‘생태적 회개’가 참으로 절실하고 절박하게 와닿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둘째, 찬양입니다.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흠숭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잊고 지내는 하느님 찬양과 흠숭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불행이나 비극은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을 잊을 때 정처없는 방황이요 뿌리없는 표류의 삶이요 불안과 두려움에 포위된 삶입니다. 우리 사람만이, 그리스도인들만이 지닌 특권의 축복이 하느님 찬양이요 흠숭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본능적 응답이 바로 감사와 찬양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감사와 찬양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창공을 날게 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시간입니다. 찬미, 찬양의 기쁨으로, 맛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맛은 그대로 하느님의 기쁨, 하느님의 맛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수도승은 찬미의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이런 하느님 찬미의 기쁨이 없다면 삭막한 광야 인생 어떻게 살아 낼 수 있을런지요? 제1독서 요엘서의 요엘 예언자는 우리 모두 하느님을 찬양할 것을 권고합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어제 저녁 시편 성무일도시 흥겹게 노래했던, 제가 좋아하는 시편135장 두 구절도 생각납니다. 읽는 것 보다는 그레고리안곡으로 부르기에 흥겨움도 배가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들하라.”

“이스라엘의 집안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하느님과의 소통인 기도가, 찬미와 찬양의 기도가 없었습니다. 탐욕으로 인해 완전히 하늘문이 닫혔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재산이 아닌 하느님께 달려 있는 사람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경계한 이런 탐욕의 무지의 병에 대한 예방제이자 치유제가 바로 하느님 찬양입니다. 찬미와  찬양의 하느님 맛만이 세상맛, 돈맛을 잊게 합니다.

 

셋째, 기억입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 두 개 기억할 것은 하느님과 죽음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하십니다.” 인생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요약하면, 일년사계 일년으로 요약하면 강물처럼 흐르는 인생여정에 죽음도 머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습니다. 늘 말씀드리는 바, 제 경우는 하루로 요약하면 오후 4시, 일년으로 하면 초겨울쯤 될 것입니다. 죽음을 까맣게 잊고 자족하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경고가 오늘날 부자들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악몽에 시달리던 구두쇠 스쿠르지 영감이 잠깬후 회개한 것같이 이 어리석은 부자도 이런 충격적 은총의 꿈에 잠깨어 회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정말 죽음 이후의 심판을 상기한다면 이렇게 땅에 보물을 쌓는 어리석은 행위는 멈출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요한 묵시록도 종말후의 구원과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어 종말의 구원과 심판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구원과 심판이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장면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넷째, 사랑입니다.

이웃 사람 사랑에, 피조물 사랑을 더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무절제한 탐욕으로 지구가 중병을 앓고 있으며 인류의 미래도 불확실합니다. 탐욕으로 땅에 보물을 쌓는 모으는, 쌓는, 채우는 ‘소유의 삶’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소유를 나누는, 덜어 내는, 비우는 자발적 가난의 ‘존재의 삶’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 바로 생태적 회개의 본질적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사람 이웃만 아니라 피조물 이웃도 돌보고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요셉 수도원에 몸담고 사는 피조물 형제자매도 참 무수히 많습니다. 다섯 마리 개들뿐 아니라, 많은 새끼 고양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어미 고양이들도 여럿이고 배농사에 막심한 피해를 주는 까마귀, 까치들이 많습니다. 

 

너무 피해가 심해 형제라 부르고 싶지 않지만 하느님의 배려로 먹고 살 수 있을만큼의 수확은 있으리라 믿습니다. 까마귀, 까치만이 아니라 우거진 숲 덕분에 이름 모를 새도 참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수직의 하늘문에 이어 이웃을 향한 수평의 문도 완전히 닫혔습니다.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의 모습이니 실상 이런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고 흡족해 하는 부자의 기도가 아닌 독백을 들어보세요.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러고 나서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정말 죽음을 기억했더라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에 전념했더라면 이런 땅에 보물을 쌓는 어리석은 삶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이런 부자는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요즘 제 즐거움은 산책중 맑게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구경입니다. 언젠가는 마르겠지만 마음의 계곡물은 늘 맑게 노래하며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늘 하느님 꿈을 지니고, 찬양의 삶, 죽음을 기억하는 삶,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이런 맑게 흐르는 시냇물같은 인생 여정일 것입니다. 매일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땅은 당신이 내신 열매로 가득하옵니다.

 당신은 땅에서 양식을 거두게 하시고,

 인간의 마음 흥겹게 하는 술을 주시나이다.”(시편104,13-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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