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닮의 여정 -기도, 감사, 자비-2022.9.11.연중 제24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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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11.연중 제24주일                                               탈출32,7-11,13-14 1티모1,12-17 루카15,1-32

 

 

 

하닮의 여정

-기도, 감사, 자비-

 

 

 

“내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루카15,18)

 

화답송 후렴대로 아버지께 돌아 와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어제 성가연습중 수사님의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는 조언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임종전 꼭 붙잡고 지냈다는 화답송 시편 51장도 심금을 울립니다. 이런 소원의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은 물론 우리의 기도같습니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건한 정신을 새로 하소서.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시편51;12.19)

 

저에게는 2014년 안식년때 산티아고 순례 여정 이후 지금까지의 삶도 계속되는 순례 여정처럼 생각됩니다. 아마 앞으로의 남은 삶도 희망의 순례자로서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계속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강론시 사용된 주제도 “여정”입니다. 

 

-스위스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다니다 보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라는 노란색 표지판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와 산티아고를 여기서부터?’라고 생각하며 뭔가 경이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산티아고를 갔을 때 만난 유럽인은 자신의 집 대문을 열고 나와서 지금까지 걸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도 “우아, 삶이 곧 순례구나’라고 생각하면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기쁨과 희망’ 제311호 소식지에 나온 글에 공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순례 여정의 삶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하닮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닮기의 여정을 줄인 말로 예수님 닮기의 “예닮의 여정”과 함께 자주 사용하는 강론 제목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우리 인간의 신원입니다. 새삼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하닮의 여정이 얼마나 고귀한 삶인지 깨닫습니다.

 

하닮의 여정의 모범이 되는 은퇴 주교, 전임 이병호 전주교구 주교님에 관한 글도 가톨릭신문에서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내 생애 최고 순간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매일 아침마다 걷는 이유는 예수님 향해 걸어가기 위해, 사제로 살아온 50여년 모두가 귀하고 의미있는 삶’이라는 말마디들과 한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기사였고 일부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곁을 떠나지만 않으면, 그저 막 쏟아 부어주는 분입니다. 덕분에 매일매일 놀라운 나날입니다. 그리고 내생애 최고의 순간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입니다. 무엇보다 매일 두 개의 성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손에 들고 끊임없이 외우는 성경과 대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성경입니다. 

 

아침마다 길을 나설 때 손에는 그날의 복음 말씀 등이 프린트된 종이를 들고 걷는 내내 그 성경 말씀을 외우고 또 외웁니다. 말씀을 외울 때 그 속에 확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와닿는 묵상과 성찰의 말이 떠오르면 잠시 멈춰서서 휴대폰에 메모를 합니다.” 

 

1941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82세 노년이신데도 성경독서 렉시오 디비나가 생활화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학인 제자같습니다. 참으로 하닮의 여정에 충실한 분입니다. 어떻게 하닮의 여정에 충실한 참 신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 되어 평생 기도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평생 기도의 여정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우리를 기도의 사람이 되어 기도의 여정에 충실하게 하십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과 사랑과 생명의 대화이자 소통인 기도입니다. 영혼의 숨과 같아 기도하지 않으면 영혼은 시들어 죽어버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기도하며 깨어 있을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참으로 깨어 살아 있는 복된 시간입니다. 이런 기도의 모범이, 롤모델이 오늘 제1독서의 모세입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하느님과 치열한 대결의 기도인지요! 그토록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이런 기도가 가능합니다. 백성들의 배신에 분노한 하느님을 설득하는 모세의 애원의 기도가 놀랍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당신 자신을 걸고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은 즉시 모세의 애원의 기도에 응답해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십니다. 새삼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중재자 모세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예표임을 깨닫습니다. 기도의 사람, 모세는 우리 하닮의 여정중에 롤모델이 됩니다. 이병호 주교님의 마지막 인터뷰 글도 공감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느님과 1대1로 맞짱드는 시간입니다. 온 일생이 하느님과 씨름해온 시간입니다.”

 

그대로 모세를, 하느님과 밤새 씨름해 하느님을 이긴 야곱 이스라엘을 닮았습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 하닮의 여정중에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기도의 전사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둘째, 감사입니다.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 되어 평생 감사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부 하느님께 감사입니다. 감사할 때 저절로 샘솟는 기쁨에 유우머요 평화요 찬미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결정적 특징이 감사입니다. 감사도 발견이요 훈련입니다. 눈만 열리면 우리의 온생애가 감사로 에워싸인 삶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요즘 제가 많이 강조해온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도대체 훈련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는 물론이고 행복도, 기도도, 희망도, 믿음도, 사랑도, 겸손도, 침묵도, 순종도 훈련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훈련의 열정도 샘솟아 한결같은 영적 훈련병의 삶입니다. 

 

이래야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훈련이 없어 무기력, 무의욕, 무감각으로 속절없이 내외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삶입니다. 영적 탄력을 유지하고 건강한 영혼으로 살기 위해 영적훈련, 자기훈련은 필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제는 ‘바오로의 감사’의 고백입니다. 자기 지난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며 하느님 자비에 감사하는 바오로입니다. 물흐르듯 바오로의 겸손한 감사의 고백이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 흘렀습니다. 나는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바오로 삶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면 그대로 감사의 고백이 넘치는 감사의 여정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최고의 명약名藥이 감사입니다. 참으로 감사할 때 더불어 기쁨과 평화와 행복이요 웬만한 영육의 병은 다 치유될 것입니다. 마지막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와 찬양의 고백도 참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셋째, 자비입니다.

참으로 자비의 사람이 되어 평생 자비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얼굴이자 이름이 자비입니다. 자비의 여정을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니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인 자비행입니다. 자비할 때 지혜요 이 둘은 함께 갑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기도의 달인이자 대가가 제1독서의 모세라면, 감사의 달인이자 대가는 제2독서의 바오로이고, 자비의 달인이자 대가는 오늘 복음의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의 아드님, 성자 예수님을 통해 남김없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자비하신 예수님이 아니곤 그 누가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알려 줄 수 있겠는지요!

 

소외된 불쌍한 이를 몸소 찾아나서는 겸손과 연민의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은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는 끝까지 잃은 하나를 집요하게 찾아내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 즉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에서는 끝까지 집을 떠난 아들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에 정통하신 성자 예수님이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기쁨이 어디 있는지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롭게 배우고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세 비유 끝에 나오는 세 구절이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기쁨의 소재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1.“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한다.”

 

2.“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3.“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셋다 감동적인 비유요,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그대로 전해 주는 참으로 자비하신 성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평지설교중 다음 구절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새삼 자비의 여정은 그대로 하닮의 여정에 직결됨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바오로처럼 성부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할 때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성자 예수님처럼 자비의 여정에 충실할 때 하느님을 닮고, 모세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기도할 때 하느님을 만나니 말입니다. 기도와 감사, 자비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말그대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한문장으로 요약하면,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나고, 감사할 때 주님의 축복을 받고, 자비할 때 주님을 닮습니다.' 기도하고 감사하고 자비할 때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과 일치의 여정, 하닮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미사중 감사기도 영광송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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