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12.연중 제24주간 월요일 1코린11,17-26.33 루카7,1-10
주님과 만남의 여정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게 하소서."(시편90,14)
물 주지 않으면 시드는 화초처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지는 사람처럼,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기도해 하느님을 만나야 영혼도 삽니다.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을 만나지 않으면 영혼은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고 시들어 죽습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자명한 이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하고, 화초에 물주듯 영혼에 물주듯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노래하며 맑게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이 참 보기도 듣기도 좋습니다. 얼마전 내린 하늘비 때문입니다.
하늘비 없으면 언젠가는 바짝 마른 죽은 계곡이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역시 맑게 노래하며 흐르는 영혼의 계곡물입니다. 어제 영적독서(“사랑 아니면 두려움”;관옥 이현주 지음)중 마음에 와닿았던 내용입니다.
-1.동산양개라는 선승禪僧의 시가 참 깊습니다. 여기서 “그”와 “여래”는 주님으로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어디서나 눈만 열리면 만나는 주님입니다. 그러나 꼭 필요하지 않으면 주님을 찾아 굳이 밖으로 찾아나설 것은 없습니다.
“남한테서 찾지 마라,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나로부터 멀어지느니.
나 이제 홀로 가는데,
가는 곳곳에서 그를 만나노라.
그는 나인데,
나는 그가 아니로다.
이렇게 깨달아야만,
문득 여래와 하나 되리라.”
‘그는 나인데 나는 그가 아니로다.’, ‘주님은 나이나 나는 주님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그분과 깊은 일치의 깨달음을 전해 주는 기막힌 선시禪詩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눈만 열리면 만나는 주님이요 주님과 일치의 경지를 살아가는 신비가의 삶을 보여줍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2.세상을 향하여 웃기는 쉽지만 아내를 향하여 웃기는 쉽지 않은 게 보통이다.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되었다. 어떻게 하면,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물리物理에 순順하여, 늙을수록 사람이 너그러워지고 부드러워질 것인가? 길은 하나다. 살아서 다시 한번 어머니 자궁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으로 하면 죽기 전에 죽어 거듭나는 거다. 그러면 저절로 부드러워지고 괜히 너그러워진다. 따로 애쓸 것 없다.
바로 이를 시스템화한 것이 가톨릭교회의 성전에서의 파스카의 신비를 살게 하는 날마다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어머니의 자궁같은 주님의 성전에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바치는 우리의 시편성무일도 미사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주님을 만나 우리를 너그럽고 부드럽게 만듭니다.
3.철수 화백과 이야기 나누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제는 사람들 얼굴에서 어떤 표정도 따로 읽지 않는단다. 곁에 계시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한 말씀하신다. “자네가 드디어 그윽한 눈길을 얻으셨군. 사람들 얼굴에서 온갖 표정이 한꺼번에 읽힌다니 말일세. 허허허.” 선생 말씀을 듣고 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아, 무엇을 보든지 보이는 겉모양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관통하여 보이지 않는 중심에 가서 닿는 그윽한 눈길! 하늘이시여, 부디 당신의 그 눈길로 오늘도 사람과 세상을 보게 해 주십시오.-
끊임없는 기도 은총이, 오랜 정주의 수도공동생활을 통한 은총이 이런 주님의 눈길을 얻게 합니다. 바로 이런 예화를 전제로 오늘 말씀에 접근합니다. 오늘 복음은 백인대장과 주님과의 참만남의 사건을 전해 줍니다. 겸손할 때는 주님이 가까이 느껴지지만 교만할 때는 멀리 느껴지는 주님입니다. 자기 노예에 대한 극진한 사랑에서 또 그의 일상의 착한 행실에서 백인대장이 진인眞人임을 깨닫습니다. 자기 노예를 살려 달라는 전갈을 예수님께 전하면서 덧붙인 말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백인대장처럼 종파를 초월하여 의인義人은, 선인善人은, 성인聖人은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과 주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때가 되자 비로소 주님을 만나게 된 백인대장, 이것은 분명 하느님 은총의 섭리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청을 들은 예수님의 그윽한 눈길은 이미 시공을 초월하여 백인대장의 그 겸허한 진심을 꿰뚫어 봤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이방인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감탄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통해 주님과 만남의 은총으로 치유되어 건강해진 백인대장의 노예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사건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을 통한 참사람과 참사람의 만남이요, 주님과의 만남에 모범이 되는 사례입니다. 동산양개의 선시에서처럼 그분이신 주님을 만나 노예를 살린 백인대장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노예를 살렸을 뿐 아니라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만나 자신도 구원한 백인대장입니다. 아마도 주님과의 만남은 평생 잊지 못할 살아 있는 구원의 추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자신의 겸손한 청에서 그분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바로 여기에 근거한 미사시 성찬전례중 성체를 모시기전 우리 모두가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문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참여하는 미사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을 배우게 하여 일상 생활에서 주님의 그윽한 눈길로 이웃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윽한 눈길을 지니게 하는 데 미사훈련보다 더 좋은 수행 은총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의 만찬에, 즉 성찬례, 미사에 관한 당시 코린토교회의 문제점을 전해 줍니다. 주님 안에서 공동체의 일치와 평화를 누려야 할 주님의 만찬인데 일부 몰지각한 이들로 인한 불화와 분열에 대한 문제점의 지적입니다. 이래서는 미사를 통해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합니다.
새삼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이 주님의 만찬, 미사참례에 결정적 선결 조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친절하게 성찬례의 핵심을 상기시키며 이들을 화해와 일치로 인도합니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적 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
그당시 미사는 아가페 공동식사후 있게 됩니다. 미사전 아가페 식사때 먼저 일찍와서 혼자만 배불리 먹지 말고 기다렸다가 늦게 오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눈후 미사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시라는, 바오로 사도의 불화와 분열을 조장하는 몰지각한 신도들에 대한 당부입니다.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성전에서의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하느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시편73,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