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15.목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히브5,7-9 요한19,25-27
비움의 훈련, 비움의 여정
-“축제인생을 삽시다! 고해인생이 아닌”-
“동정 성모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
오늘 복음 환호송이 우리 믿는 이들의 소망을 대변합니다. 바로 영원한 우리 삶의 자리,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성모님과 함께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는 것, 바로 이것이 참으로 믿는 우리들의 궁극의 소망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사는 것은 먹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먹고자 하는 일인데, 먹는 재미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라는 말도 종종 듣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을 사는데는 인색하지만 먹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씁니다. 식사는 물론 가끔 간식할 때 마다 먹는 것이 죄요, 사는 것이 죄란 생각이 듭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무공해의 동식물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먹고 나면 어김없이 남아 쌓이는 쓰레기들입니다. 수도원 쓰레기장에 갈때마다 저절로 나오는 한숨이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옛날 보다 급격히 증가한 택배도 거의 먹는 것과 관계되며 나가는 쓰레기들도 여기서 파생된 것들입니다. 1회용으로 버려지는 비닐, 병, 종이,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러다보면 나라가, 세계 전체가 쓰레기장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어렸을 때 50-60년 대는 가난했지만 버려지는 쓰레기들은 거의 없었고, 있어도 다 자연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질 거름이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기는 맑고 자연은 아름답고 어디를 파도 샘솟는 우물이요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는 고기도 많았습니다.
전기가 없어도 가능한 삶이고 문명이었으며, 중학교 시절까지 밤에는 호롱불과 남포 석유 등불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자연속 어디나 일터나 놀이터였고, 쉼터나 배움터이자 샘터였으며 자연과 일치된 ‘이야기들(stories)’과 ‘사실들(facts)’로 가득한 풍요로운 삶이었습니다. 대학가서 비로소 손목 시계를 가졌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파도 건강하고 행복했습니다. 마을은 살아 있었고 모두가 가난했지만 함께 나눴기 때문입니다. 안경쓴 아이들이나 정신 질환자들은 한둘뿐이었습니다. 채소들은 거의 모두가 텃밭에서 나왔습니다. 결코 감상적 퇴행의 회고나 미화나 찬양이 아니라 당시의 거울에 오늘을 비춰 보기 위함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어제 9월14일 ‘성 주님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과 오늘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이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참으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 모자분으로부터 자발적 금욕과 절제, 순종과 겸손, 극기와 인내의 순교적 삶을 배웁니다.
어제 병원에 다녀 오면서 ‘주교대의원회의 범아마존 특별 회의 후속 교황 권고’인 ‘사랑하는 아마존’을 읽었습니다. 한결같이 주옥같은 명문에 현대의 소비주의 광란狂亂의 눈먼 자본주의 시대에 주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깊은 가르침이 가득했습니다. 순교자 성월, 비상한 삶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생태적 회개에 걸맞는 순교적 실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랑의 아마존’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에 이어 책의 끝부분 결론에 나오는 마리아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의 얼굴, 곧 하나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드님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피조물인 한 여성 마리아의 얼굴을 통하여 당신의 권능과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여성은 성모 마리아의 온유한 힘을 드러내면서 여성 고유의 방식으로 교회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에 오로지 기능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교회의 가장 내밀한 구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왜 여성이 없으면 교회가 무너지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중심부의 자리잡고 있는 마리아 성모님이요, 또 하나의 성모님들인 여성 신자들입니다. 끝으로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이라 의미가 새롭습니다.
“생명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존재하는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시고
부활하시어 주님 빛으로 어머니를 변모시켜 주시어
모든 피조물의 모후가 되게 해 주셨나이다.
성심이 창에 찔리신 어머니,
핍박받는 자녀들과 자연의 상처 속에서
어머니도 아파하시니
아드님과 함께 다스리소서.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작품을 두고
그 누구도 주인으로 자처하지 못하게 하소서.
생명의 어머니,
이 칠흑 같은 어둠의 시간에
어머니를 믿고 의지하는 저희를 저버리지 마소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 모든 교황님들의 성모신심은 참 각별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번 38차 해외 사목활동차 여행에 오를 때도 출국과 입국할 시는 꼭 성모 성당에 가서 인사드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교회의 사람들은 성모님과 그 아드님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성모님과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늘 함께 하셨습니다. 성가 248장 그대로입니다.
“한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십자가 지신 주님 뒤따라 가시며 지극한 고통중에 기도드리셨네.”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수난 현장에서 주님과 고통을 함께 하는 성모님에게서 비움(케노시스)의 절정을 봅니다. 피에타의 성모님, 죽은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또 여기서 제1독서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성모님도 이런 예수님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비움은 예수님의 비움처럼 그대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탄원이였음을 봅니다. 정말 이런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은 비움을 통해 하느님 연민의 사랑으로 채워 ‘텅 빈 충만’이 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 고통에 압도되어 완전히 파괴되어 무너져 폐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애제자가 있습니다. 교회전통은 예수님의 애제자를 요한이라 말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가 구상해 낸 상징적 인물인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여기 나오는 애제자는 우리 믿는 모든이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줌과 동시에 삶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언제나 함께 하는 우리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믿는 남자인 아들만이 아니라 믿는 여자인 딸들도 모두 성모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애제자가 상징하는 바, 우리 모두요, 이제부터 우리 하나하나는 각자의 집에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영원한 어머니가 되시는 마리아 성모님을 평생, 영원히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슬픔이, 절망이, 어둠이,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믿는 우리들은 주님을 닮아, 주님을 따라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삽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늘 함께 하시기에 고통중에도 평화를, 슬픔중에도 기쁨과 감사를, 절망중에도 희망을, 어둠중에도 빛을, 죽음중에도 생명을 삽니다. 결코 어둠과 죽음의 세력에 압도되어 고해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감사, 기쁨과 희망의 축제인생을 삽니다.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부정적 체험을 그대로 짐으로 받아 안아 상처를 입고 좌절하는 삶이 아니라, 즉시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순종의 계기로 삼아 부단한 자아초월로 주님을 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감사, 기쁨과 희망의 축제인생을 살아갑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물론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영원히 언제나 살아 계신 ‘구원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생명과 사랑, 평화와 감사, 기쁨과 평화가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성모님과 함께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성모님을 닮아 일상의 모든 부정적 체험을 비움의 계기로 승화하여 비움의 훈련에,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로 강론을 마칩니다. 순교자 성월이라 우울하고 어둡게 지내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렇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