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21.수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 사가 축일
에페4,1-7.11-13 마태9,9-13
구원의 출구
-따름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 공동체의 일치-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역시 순교자 복음 사가이기에 빨간 제의를 입습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 태생인 듯 하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이름을 주신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교회 전통 역시 둘을 동일한 인물로 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히브리어 ‘마티아’에서 유래하며 그 이름 뜻대로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은총의 선물처럼 주님께 불림을 받습니다. 열두 사도중의 하나인 마태오는 특별히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승마다 차이는 있지만, 마태오는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에서, “예로니모 순교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 집니다.
교회미술에서 성 마태오는 성경에 언급된 ‘살아 있는 네 생물’중 날개 달린 사람(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이렇게 일치시킨 분은 리옹의 주교 성 이레네오였습니다. 성 마태오가 복음 사가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특별히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1월16일에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태오의 성소는 그 이름 뜻처럼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이었음을 봅니다. 마태오처럼 우리의 성소 역시 주님의 선물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아 응답했기에 비로소 마태오의 운명은 바뀌고 완전히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날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구원의 출구’입니다.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만나 부르심에 응답한 마태오입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출구를 통해 나오는 것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면 자동차는 지하에서 계속 헤맬수 있습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일 마태오는 물론 우리가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태오는 평생 구원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세리 레위로 인생을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마쳤을 것이며 우리 역시 방황하다 세상을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평생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찾아 만나지 못해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살다가 아까운 인생 마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마태오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은총의 섭리였음을 봅니다. 세관에 앉아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마태오의 갈망을 한 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즉시 그에게 명하십니다.
주님은 죄인 세리라는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마태오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갈망과 열정을 직시하십니다. 참으로 부르심에 앞서 주님을 찾는 마태오의 간절한 갈망이 전제됨을 깨닫습니다.
“나를 따라라.”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길이자 구원의 출구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이제부터 단조롭고 무의미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참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새 삶이 시작된 마태오입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지금까지 존재감없는 삶에서 이제부터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마태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 나서는 ‘따름의 여정’에 오르게 된 마태오요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주변으로부터 죄인 취급 받으며 세관에서 “혼자” 고립, 소외된 삶을 살다가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하여 이제부터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구원의 여정에 오른 마태오입니다.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에 속한 우리의 모습도 마태오와 흡사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식사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이뤄주는 공동식사의 미사잔치입니다. 바로 여기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공동식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의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회개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요 우리가 속한 교회공동체입니다. 죄가 없어서, 잘나서 불림받은 우리가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은총으로 불림 받았음을 깨닫습니다. 깊이 잘 들여다보면 세상에 병자 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깨달을 때 저절로 감사요 겸손입니다.
이런 자비로운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의 가르침이 참 적절합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에페소 교회 공동체 역시 내외적으로 불화와 이단의 위협을 겪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 성원들 모두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 하시며 공동체의 일치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볼 때 이렇게 살 수 있고, 이렇게 살 때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닮습니다. 이어지는 공동체의 특성인 하나에 대한 강조가 참 인상적입니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 하나의 성령, 하나의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하나의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모두가 하나 중심의 일치의 공동체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무소부재(無所不在), 그분의 힘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무소부지(無所不知)의 하느님에 대한 묘사도 은혜롭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해, 만물 안에 계십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공동체의 일치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공동체 일치의 유일한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