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의 삶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이다-2022.9.22.연중 제25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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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22.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코헬1,2-11 루카9,7-9

 

 

 

하느님 중심의 삶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이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14)

 

또 강론 제목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부제로는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이다’가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은 빛입니다. 그러니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빛이신 하느님뿐입니다. 마치 밤의 어둠을 몰아내며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하느님입니다. 

 

삶이 선택이듯 빛과 어둠도 선택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느냐. 어둠인 허무를 선택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창밖 아래 진흙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밖 하늘 위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묵상중 감히 9월9일자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제 말로 바꾸어 읽어 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평생 매일 강론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강론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로 맡겨진 것입니다.”(1코린9,16-17)

 

곳곳에서 원하고 요구하는 분들이 많기에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써서 나누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쓰는 행위는 마치 새벽 일찍 허무의 허공에 말씀의 태양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의 빛, 사랑의 빛을 상징하는 말씀의 태양이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길 소망하며 하늘에 태양을 쏘아 올리듯 날마다 강론 태양을 허공의 어둠으로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2020.12.1.일 제 집무실 게시판에 써붙인 글이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요, 하루의 양식이자 하루 삶의 의미요, 중심이자 방향이요, 유언이자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다.”

 

역시 살기 위해, 살아 있음의 확인을 위해 쓰는 강론입니다. 날씨가 썰렁한 가을로 접어들면 저절로 본능적으로 빨라진 퇴근 걸음들은 대부분 따뜻한 집의 보금자리 품을 향합니다. 지친 영혼들의 위로처와 안식처가 되는 가정은 마치 주님의 집과 같습니다. 또 많은 이들이 가을을 맞이하면, 특히 나뭇잎들 지는 늦가을 만추晩秋가 되면 삶의 허무감에 영혼의 몸살을 앓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전례를 통한 섬세한 배려가 참 놀랍고 고맙습니다. 가을철 삶의 허무감에 빠지지 않도록 허무의 계절을 기도의 계절로 바꿔줍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대림의 기쁨에 허무가 침투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허무의 어둠을 환희의 빛으로 바꿔주는 기도의 은총입니다. 

 

어찌보면 삶의 허무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기도하라는 신호로 하느님의 초대장일수 있습니다.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삶의 허무와 더불어 삶의 무지, 무의미에 대한 답은 하느님 중심의 삶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을 말끔히 자취없이 몰아내는 것은 빛이신 그리스도,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기도로 빛이신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허무, 무지, 무의미의 어둠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전례중 매일미사 말씀의 배치도 참 절묘합니다. 말씀을 골고루 균형있고 조화롭게 배치해 줌으로 영적 편식이나 과식을 막아 줍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을 보니 참 반가웠습니다. 종파를 초월, 믿는 이건 믿지 않는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공감하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전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역설적으로 코헬렛을 최고의 지혜라 찬탄했습니다. 바로 허무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에서 허무에 대한 답을 찾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코헬렛 주제를 나타내는 2절 이후 내용도 가슴 서늘한 충격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성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연인의 사랑을 소개하는 아가서가 있는가 하면 이런 극단의 인생 허무를 노래한 코헬렛도 있습니다. 바로 이 아가서가 코헬렛 뒤에 옵니다. 가을 인생에 접어든 이들의 필독서가 코헬렛이요, 이어 생명과 사랑의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허무’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입깁’ ‘실바람’을 뜻하는데, 추상적으로는 ‘허무’ ‘허망’ ‘무상’ ‘덧없음’ ‘헛됨’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상’을 가리키는 중요한 말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이 말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73번 사용되는 데 코헬렛에서 38번 나옵니다. 이책의 중심 주제인 이 말은 맺음말 첫머리에서도 되풀이 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1,2;12,8)

 

삶은 엄중한 선택입니다. 허무를 선택하면 필시 삶의 본질은 허무라 할 것이며 어둠으로부터 구원의 해방은 요원할 것입니다. 반면 빛이자 생명이자 사랑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면 삶의 본질은 허무가 아니라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선택함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삶의 본질은 허무가 아니라 사랑이 맞는 것입니다. 하느님 선택에 이어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부단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규칙적으로 공동전례기도훈련에 매진함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허무나 무지, 무의미가 도저히 침투할 수 없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짧은 단락의 루카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줏대없고 우유부단한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안절부절, 갈팡질팡, 두려움과 불안에 떱니다. 그대로 삶의 중심이 없음을 반영합니다. 하느님 중심이 없거나 잃어버렸을 때 누구나의 보편적 감정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이런 이들은 십중팔구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희생물이 되기 마련입니다. 도저히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늪에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래서 하느님의 선택과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 내려야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헤로데 영주의 반응을 보십시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그러면서 그는 예수를 만나 보려고 하였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흡사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화두같습니다. 바로 우리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은, 또 언제나 선택하여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할 분은, 생명과 사랑의 빛이신 하느님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뿐이십니다. 참 어리석게도 늦게서야 빛이신 주님을 찾기 시작한 헤로데입니다. 

 

바로 날마다 거행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을 몰아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의 빛 안에서 ‘텅 빈 허무’가 아닌 ‘텅 빈 충만’의 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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