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를, 심판을 기억하라 -나무처럼, 시詩처럼, 한결같은 삶-2022.9.24.연중 제25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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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24.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코헬11,9-12,8 루카9,43ㄴ-45

 

 

창조주를, 심판을 기억하라

-나무처럼, 시詩처럼, 한결같은 삶-

 

 

어제 금요강론 대목중 잊혀지지 않는 대목과 설명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마지막 50절중 ‘주님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란 대목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결같음과 머뭄은 정적靜的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는 것을 뜻한다. 뿌리를 내리면서 나무는 가지들을 뻗는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해 서두르는데 한결같음을 뜻한다. 에우치리우스는 “우리는 부르심과 진보의 자리에 서있으면서 한결같음과 인내로서 경주에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역동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뿌리를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한결같은 위치로서의 어떤 자리와 함께 하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은 내적 안정과 함께 유연하고 온세상에 열려있다. 나무처럼!’

 

여기 요셉 수도원의 배경인 한결같은 불암산과 곳곳에 산재한 무수한 나무들은 정주의 표상으로 안정과 평화, 위로와 치유를 줍니다. 세계 2차 대전중 젊은 나이 32세로 전사한, 평생 32편의 시만 남겼다는 미국 뉴저지주 출신 조이스 킬머(1886-1918)라는 시인의 ‘나무들’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나는 생각한다. 나무들처럼 사랑스런

시詩를 결코 볼 수 없으리라고.

 

대지의 단물 흐르는 젖가슴에

굶주린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

 

온 종일 신神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여름엔 머리칼에다

붉은 방울새의 둥지를 치는 나무.

 

그 가슴에 눈이 쌓이고

또 비와 함께 다정히 사는 나무.

 

시詩는 나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오직 신神일뿐.”

 

하느님만을 찾는 정주 수도승의 특징은 나무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나무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무처럼’, ‘하느님의 시처럼’ 살아가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정주의 수도승들입니다. 문득 25년전 써놓은 ‘나무’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결같은 하느님의 나무처럼, 하느님의 시처럼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로서 코헬렛은 끝나지만 내용이 참 풍요롭고 공감 충만입니다. ‘젊음을 즐겨라’, ‘늙음과 죽음’, ‘맺음말’로 끝나며 아쉽게도 마지막 ‘발문’은 생략되고 있습니다. 일부 대목을 인용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 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수시로 후렴처럼 강조되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마디입니다. 창조주와 더불어 우리의 ‘죽음’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 코헬렛의 맺음말은 처음과 똑같이 인생 허무에 대한 고백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마지막 임종어가 이 말마디라면 얼마나 허전하겠는지요!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 심판, 죽음, 허무에 대한 묵상이 우리 모두 분발하여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향해 가지들 뻗은 나무들처럼 한결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생략된 코헬렛의 마지막 부분도 나누고 싶습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그러니 결국 허무로 시작해서 하느님 경외로 끝나는 코헬렛이요, 결국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늘 삶의 허무와 죽음, 하느님을 기억할 때 일희일비함이 없는 한결같은 삶, 담담한 내적 열정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이점이 부족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의 변모 체험후 어떤 아이에게 더러운 영을 내쫓아 내신 주님의 일에 몹시 놀라 한없이 고무된 제자들에게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니 청천벽력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스승이신 주님을 모르는 미숙함을, 한결같지 못함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며, 이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몹시 불안해 보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요, 주님의 수난에 이어 부활 체험후에야, 한결같은 파스카의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때의 주님 제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미 파스카의 삶을 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영원한 삶이 가능합니다. 이에 더하여 삶의 허무, 죽음, 심판에 대한 생각이 더욱 우리를 깨어 한결같이 나무처럼, 시처럼 살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은 이 거룩한 파스카 잔치 미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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