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3.연중 제27주간 월요일 갈라1,6-12 루카10,25-37
사랑의 여정, 사랑의 훈련, 사랑의 전사
-사랑밖엔 길이 없다-
오늘은 단기 4355년, 서기로는 2022년 10월3일 개천절입니다.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날로 4대 국경일중 하나입니다. 제 어렸을 때만해도 달력에는 단기와 서기가 함께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개천절開天節 뜻도 새롭고, 개천절 가사 1절도 오랜만에 찾아 노래해봤습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단군이시니를 하느님이시니로 읽으면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서력기원전 2333년에 하늘을 열고 나라를 세워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가 흡사 성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한민족 국가임을,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유구한 전통의 문화민족, 하느님의 백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강론은 믿음에 대해 나눴고 오늘은 사랑에 대해 나눕니다. 믿음 대신 사랑을 넣어 “사랑의 여정, 사랑의 훈련, 사랑의 전사-사랑밖엔 길이 없다-”로 정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전반부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사랑의 이중계명이 나오고, 후반부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우리들은 또 사랑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자연의 피조물 사랑까지 더하여 사랑의 삼중계명 시대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올해의 배피해도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란 깨달음입니다. 평년 수확의 반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배농사는 잘 되었는데 본의 아니게 피조물인 까마귀, 까치, 벌레들과 함께 나누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올해 교회일치적 기념의 시기는 9월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시작하여 내일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에 끝나며 우리 수도자들은 그동안 매일 끝기도때마다 공동으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문을 바쳤습니다. 바로 이와 맞물려 9월 피조물들과 나누다 보니 배밭농사가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교황님의 담화문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찬가에 우리도 동참합시다. ‘저의 주님, 주님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찬미받으소서.’ 시편저자와 함께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50,6) 노래합시다.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노래에도 비통에 찬 울부짖음의 합창이 따릅니다.
먼저 우리의 누이이며 어머니인 지구가 울부짖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소비주의적 만행의 희생양이 되어 흐느끼며 우리의 남용과 지구의 파괴를 멈추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울부짖는 피조물들도 있습니다.
창조 사업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중심성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자의적인 인간 중심 주의’에 휘둘려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하고 있고, 그들의 찬양 노래가 들리지 않습니다.”
참으로 피조물인 자연사랑과 더불어 생태적 회개의 절박성을 깨닫습니다. 요즘 수도원 쓰레기장을 보면 산같이 쌓이는 쓰레기들에 저절로 탄식이 나옵니다. “아, 먹는 것이 죄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부분 택배를 비롯해 식품과 관계된 쓰레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어렸을 때 50-60년대 버리는 쓰레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배설되는 오물들은 밭으로 갔고, 음식물 찌거기와 구정물은 돼지나 닭이 먹었습니다. 모두가 저절로 지속가능한 순환시스템의 삶이었습니다. 나무와 흙과 짚과 돌들로 이루어진 집들도 허물어지면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감상적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의 심각성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사랑의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평생 사랑의 전사로 사랑의 영적전투와 더불어 사랑의 영적 훈련에 전념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어제는 미사중 ‘사랑의 전사로 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다가 영적전투중 부상으로 인해 병이 들어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주님과 하나 되고, 보속補贖과 대속代贖의 삶이 된다면 이 또한 축복이요 감사가 될 수 있겠다.’하는 깨달음에 위로가 되고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끝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전쟁중 부상이나 상처의 아픔을 잘 관리하고 보살피며 한결같이 사랑의 영적 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다 보면 하느님 친히 도와 주실 것입니다. 오랜 군생활의 백전노장들이 전투에 부상도 많은 것처럼 평생 주님을 위해 영적전투를 하는 수도자들 역시 훈장처럼 병도 상처도 많을 것이며 전혀 부끄러워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정작 부끄러워할 것은 병이 아니라 죄요, 정작 무서워할 것은 병으로 인한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영혼의 죽음’입니다.
제1독서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그리스도의 종인 바오로 사도는 하나인 복음에 대해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자체가 바로 복음임을 일깨워 줍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얻은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오늘 루카복음서에서 배웁니다.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우리 사랑의 전사가 명심하여 지켜야 할 내용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율법교사가 이처럼 사랑의 이중 계명을 대답했을 때, 주님이 주신 답변은 사랑의 전사들인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저는 여기 사랑의 이중 계명에, “네 주변의 이웃인 피조물 자연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를 더하여 사랑의 삼중계명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착한 사마리안의 출현이 놀랍습니다. 사랑의 전사들인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이요 모범이 됩니다. 종교인도 유다인도 아니면서 자비하신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사제도 레위인도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피하여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시종일관 최선의 사랑을 다해 살려 냅니다. 사랑의 전사라면 모름지기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내 중심이 아닌,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인가?”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중심에 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한 하느님의 세 특징을 지녔음을 봅니다. 초주검이 된 이를 살려 내는 과정에서 사마리아인의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 의 세 모습에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마지막 주님과 율법교사가 주고 받은 대화가 우리에게는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은 관념이나 추상명사가 아니라 행해야 하는 동사입니다. 사랑의 전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수행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수행자되어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다음 말씀대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