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4.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에페1,11-14 루카12,1-7
사랑의 주님과 일치의 여정
-“두려워하지 마라”-
참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일치의 여정입니다. 과연 주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는 여정인지요?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주님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원로 정치인의 회고록을 읽다가 마음에 와닿은 DJ(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동아시아의 만델라같은 DJ의 최후 진술은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어요, 보복을 재생산하지 말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지만, 저 양반이 하느님을 정말 믿고 그 뜻을 따르는구나 싶더라고.
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종교도 없었어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 추상성이 극대화된 게 신학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DJ를 보면서 신은 모르겠지만 신앙은 확실히 있구나 싶더라고. 그리고 DJ가 아주 속된 정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DJ는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 받았다고 하셨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예수님을 만나셨다는 거야. 은유적인 표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씀을 하셔. 그때 살아서 돌아온 게 기적같은 일이긴 해요.”
이 또한 DJ의 주님과 만남의 여정중에 있었던 기적같은 일화였음을 봅니다. 이런 알게 모르게 주님과 만남의 여정, 일치의 여정중에 깊어가는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3시경 성무일도시 찬미가 한연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주소서.”
주님은 믿는 이들의 모두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주님과 무관無關한 삶이라면 도저히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빛이요 생명이신 주님만이 삶의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로서 제1독서 에페소서 그리스도 찬가는 끝납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신원이 장엄하게 고백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절 생략할 수 없는 고백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이런 고백은 그대로 암송해두면 좋습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깊은 내적 안정과 평화를 줍니다. 그대로 삼위일체적 우리의 복된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의 신원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의 인장을 받은 우리들, 성령께서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부단히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찬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복된 우리들입니다. 이런 믿음만이 우리를 원초적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합니다. 세상에 두려움, 불안 없는 사람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입니다. 어찌보면 두려움과 불안은 인간 무지의 소산이요 하느님을 찾으라는, 하느님을 만나라는 표지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주님과 깊어가는 일치의 여정중에 서서히 걷히는 무지의 어둠이요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마라.”(마태14,27)
바로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늘 수도원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가슴 활짝 열고 환대하는 예수성심상밑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불암산을 배경한 예수성심상은 제가 날마다 사진에 담을 정도로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온통 “두려워하지 마라”는 내용입니다. 우선 바리사이들의 위선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위선이 아닌 안팎이 같은 진실하고 투명한 삶을 살라 하십니다.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당당하게 주변을 환히 밝히는 복음 선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워할 분은 영혼의 죽음에 이르게까지 할 수 있는 하느님입니다.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함께 가는 외경畏敬의 두려움입니다. 정말 두렵고 무서운 것은 스스로 자초한 하느님으로 부터의 단절이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끊겨져 나가는 영육의 죽음입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의 사실이 두려운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을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와 희망과 사랑만이 두려움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하는 근원적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날로 주님과 가까워지고 깊어지는 신망에信望愛 일치의 삶과 더불어 걷히는 무지와 허무의 어둠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시며 당신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