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하나? -“슬기롭게”-2022.11.2.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02, 2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2.11.2.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지혜4,7-15 로마6,3-9 마태25,1-13

 

 

어떻게 살아야 하나?

-“슬기롭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11,25-26)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바로 오늘 복음의 이 구절이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였습니다. 얼마나 신랑이신 주님을 만나길 갈망한 죽음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어느 자매가 들려준 남편의 마지막 유언,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마지막 임종어에 모든 앙금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죽어서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이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이냐?”의 질문에 대한 답에 흡족했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 물어도 이와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의지대로 될 수 없는 은총이지만 간절한 소원은 오늘부터 남은 동안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정말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보다 이웃에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의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라 하루하루 전 일상의 평범한 삶자체가 죽음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어제 모든 성인 대축일에 이어 11월 위령성월 둘째 날 위령의 날 배치가 참 고맙습니다. 올해는 며칠전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56명의 희생자들로 인해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위령의 날이 되었습니다. 

 

8년전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312명이 희생됐던 날이 사순시가 성주간 수요일이었는데, 마침 가톨릭의 성주간의 전례시기 중이라 잊혀지지 않는데, 이번 이태원 참사는 위령성월을 앞둔 참사라 또 길이 잊지 못할 아픈 추억이 되겠습니다. 새삼 마음 아파하는 희생자들의 모든 어머니들과 함께 아파하는 어머니인 가톨릭 교회는 종파와 인종,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의 보편적 어머니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은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과 직결됩니다. 한마디로 하루하루 깨어 ‘슬기롭게’ 사는 것이며, 슬기로운 삶의 위한 네 원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삶은 끝이 있습니다.

엄연한 삶의 진리입니다. 삶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끝은 시작입니다. 겨울후 부활의 봄이듯 죽음이후에는 부활의 새로운 삶입니다. 아니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이미 살아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이미 영원한 파스카의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부활신앙이 참 영원한 희망입니다. 위령감사송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둘째, 삶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삶의 중심이 없어 혼란이요 방황이요 뿌리없이 표류입니다. 주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내릴수록 내적평화와 안정이요, 믿음의 뿌리가 얕고 빈약할수록 점증하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이래서 삶의 중심인 주님이 고마워 저절로 나오는 화답송 시편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이어지는 제 행복기도 고백도 주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답고 놀라운 하루이옵니다.”

 

셋째,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많이’ 햇수의 양量이 아니라 ‘참으로’ 사는 햇수의 질質입니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찬미하며 사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서 말씀이 적절한 도움이 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

 

넷째, 깨어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깨어 준비하며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렇게 깨어 준비하며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기름등잔에는 신망애信望愛의 기름이 늘 채워져 있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의 영혼 등잔들에는 기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었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확인도 안했습니다. 이건 이태원 참사처럼, 천재天災가 아니라 순전히 인재人災입니다.

 

영혼등잔의 신망애의 기름은 각자 평생 하루하루 마련해야 하는 것이지, 일순간에 마련되는 것도 아니고,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깨어 준비하며 등불은 환히 켜들고 있다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입장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입장이 좌절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나중에 기름을 채워 왔지만 문은 닫혔고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닫힌 문을 두드립니다만 주인님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요지부동 단호합니다. 이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보속하라, 대속하라, 찬미하라, 사랑하라, 섬기라, 기뻐하라, 감사하라’고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죽어서는 회개도 보속도 대속도 찬미도 사랑도 기쁨도 감사도 없습니다. 죽음의 문이 닫히면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평상시 삶 전체가 죽음 준비입니다. 이래야 영혼의 등불 환히 켜들고 있다가 주님과 함께 천국잔치에 입장합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주님 오실 날을 대비하며 살게 합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5,1)

 

+주님, 세상 떠난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Articles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