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2.토요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1580-1623) 기념일
3요한5-8 루카18,1-8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진리의 연인, 진리의 증인, 진리의 협력자-
요즘 계속되는 성인 축일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듯 성인도 다 다릅니다. 진리의 사람, 진리의 성인입니다.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고유의 성인이, 진리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성인이 되고 싶은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오늘은 ‘일치의 사도’라 칭하는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만43세 순교하셨습니다. 그리스 동방 교회와 라틴 교회의 일치를 위한 수호자요 순교자였던 성인은 동방 정교회 신자로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가톨릭이 되었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제가 되었습니다.
후에 폴로즈 대주교가 되었고 교회 일치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교회 일치를 반대하는 폭도들에 의해 1623년 무참히 순교의 죽음을 당했고, 첫 번째 동방교회 성인으로서 1867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성인의 순교직전 분노한 반대파 군중들에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비텝스크의 시민 여러분은 나를 죽이려 합니다. 여러분은 거리에서도, 다리 위에서도, 도로에서도, 시장에서도, 도처에서 나를 해치려 음모를 꾸몄습니다. 나는 여기 여러분 가운데 목자로서 있으며 여러분도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성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의 수위권을 위하여 또한 거룩한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어 사제관에 난입한 폭도들을 꾸짖다 무참히 순교의 죽음을 당합니다.
“형제들이요! 당신들은 어찌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느냐? 나에게 불만이 있으면, 나를 상대할 것이 아닌가! 나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 무지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닫습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입니다. 성 요사팟 역시 진리이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진리의 사람, 진리의 순교자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막연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주 예수님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에의 순종은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 주님께 대한 순종으로 직결됩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의 셋째 서간이 아름답습니다. 역시 눈에 띠는 말마디는 진리입니다.
“나는 그대를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에게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됩니다.”
‘진리의 협력자’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참 숭고한 삶이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 또한 평생 진리 추구의 삶이었고, 진리에 대한 목마름, 진리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진리의 협력자, 바로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사목 표어였습니다. 교황님의 인터뷰 대목입니다.
-“우리에겐 진리가 있고, 그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진리의 움직임을 따라가려고 노력합니다. ‘진리의 협력자’란 말마디는 요한의 셋째 서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진리를 존중하며, 거기에 의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학자로서 제게 주어진 전문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진리에 감동하여 더욱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신학자는 진리에 봉사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으며, 그 진리를 위해 협력할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협력자” 이것을 교황님의 묘비명에 새기면 좋을 듯합니다.
“그렇군요. 그것이 제 삶의 지표라면, 묘비에 새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진리의 협력자, 비단 베네딕도 16세 교황님만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섬기는 노력을 다하는 이들 모두가 진리의 협력자입니다. 반면 성 아우구스티노는 ‘진리의 연인’으로 평생 진리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참 행복도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증인으로 살 때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물러나거나 포기하지 않고 집요히 간절히 항구히 불의한 재판관을 졸라댔던 과부야 말로 기도의 모범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중요한 말마디는, 꼭 필요한 말마디는 ‘올바른 판결’입니다. 올바른 판결을, 올바른 간청을 드려야 지체없이 응답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고무적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간직하는 방편은 언제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판결을, 올바른 소원을 청하는 것이 본질적이요 결정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입니다. 한결같고 간절하며 항구한 믿음입니다. 제가 오늘의 가난한 과부라면 올바른 판결대신 다음 하나를 청하겠습니다.
“주님, 참으로 날로 믿음 깊어지는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증인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진리이신 당신을 날로 섬기며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는지요!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 소원이요 욕구일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정말 오늘 화답송 시편의 행복한 의인처럼 살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그분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이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장).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