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5.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묵시3,1-6.14-22 루카19,1-10
회개의 여정
-갈망, 만남, 회개-
어제 복음이 예수님의 예리코에 입성전 무명의 눈먼 걸인과의 만남이 주제라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리코에 입성후 자캐오와의 만남이 주제입니다. 어제처럼, 오늘의 복음도 소복음서라 할만큼 읽을 때마다 참 새롭고 은혜롭습니다.
부질없는 물음이지만, 어제의 경우 눈먼 걸인이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오늘의 경우 만약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마찬가지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현재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새삼 우연은 없고, 어제 무명의 눈먼 걸인이, 오늘의 자캐오가, 또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참으로 하느님 은총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안에서 서로 만나 수도공동체를 이뤄 사는 것도, 또 이렇게 함께 교회 안에서 주님의 자녀가 되어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놀라운 기적에 은총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우연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주님을 만나 회개함으로 주님을 알고 참나를 알게 됨으로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를 아는 것이 바로 지혜와 겸손입니다. 제가 동방영성에서 배운 것중 참 중요한 것이 무지입니다. 무지한 인간이란 것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입니다.
참으로 무지할 때 사악하고 추악하고 무능하고 기괴할 수 있습니다. 인생 광야 여정, 부단한 회개로 주님을 닮아 참나의 성인도 될 수 있지만 무지의 어둠에 머무를 때 괴물이나 폐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참사람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회개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역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할 때 첫 일성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역시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도 대부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대림시기를 앞둔 연중 마지막 시기 위령성월에 걸맞은, 무지한 인간에 대한 경고이자 회개의 촉구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도둑처럼 가겠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그러니 무지에서 벗어나 참사람이 되기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은 부단한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결정적인 처방은 회개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 역시 참회와 더불어 자비송으로 시작합니다. 날마다 미사를 통해 ‘회개의 생활화’를 이루어 주는 미사은총이 참 고맙습니다. 수도원의 일과표보다 더 좋은 회개의 시스템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의 여정에서 회개에 앞서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우선입니다. 어제의 눈먼 걸인처럼, 오늘 자캐오의 갈망도 대단합니다. 얼마나 소외되고 고립된, 외롭고 고독한 처지의 세관장 자캐오였겠는지요! 부자라지만 키도 작고 초라한 외관에 누구에게도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던 자캐오였습니다. 그러나 자캐오의 위대함은 결코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외로움은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전환하여 열렬히 주님을 갈망하며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은 전제 요소가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기도가 없을 때 실상 살아 있다 하나 죽어 있는 삶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제는 평범함의 쓰레기 통에서 산다”라고 교황 성하의 말씀인데 어찌 사제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자캐오는 달랐습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에 깨어 있었습니다. 갈망이 있을 때 영혼은 깨어 있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열렬히 주님을 찾게 되며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주님의 말씀에 경청할 것을 촉구합니다.
“귀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입성하여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자캐오는 즉시 주님을 찾아 나섭니다. 키가 작아 군중에 가린 예수님을 뵐 수 없자 군중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갑니다. 궁즉통(窮則通)입니다. 눈이 열려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하니 돌무화과나무 역시 우연적 존재가 아닌 섭리적 존재였음을 깨닫습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 오너라.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주님과의 만남이란 절정의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자캐오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제 나이 먹으니 내 이름을 불러 주실 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이제 주님 한분만 남았습니다. 불러 주라 있는 이름입니다. 아마 생전 이렇게 부드럽게 자캐오란 자기 이름을 불러주신 분은 예수님뿐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당신을 찾는 자캐오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자캐오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니, 묵시록의 다음 말씀이 주님을 갈망하여 깨어 경청하던 자캐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자연스럽게 뒤따라 오는 회개입니다. 갈망에 이어 만남이요, 만남에 이어 회개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주님을 만나 참 자기를 발견함이 바로 회개입니다. 주님 자비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죄스런 모습을 발견한 자캐오의 회개의 실천이 그의 회개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주님은 선입견도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자캐오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니, 생전 처음 사람 대접을 받고 감격한 자캐오의 자발적 회개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주님을 만날 때 회개요 참나의 회복입니다.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일어서서’ 바로 회개를 통해 부활하여 새롭게 태어난 자캐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랑의 구체적 나눔과 실천의 결행을 통해 자캐오의 회개의 진정성이 입증됩니다. 주님을 만나 참으로 회개함으로 무지의 탐욕에서 해방된 자유인 자캐오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 환호하시는 모습은 바로 잃었던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 바로 그 기쁨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어제 복음처럼 오늘 복음도 이 거룩한 미사의 축소판처럼 생각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만나 참된 회개를 통해 참나를 찾음으로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로, 자유인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기쁨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