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정화 -날마다,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성사의 수행으로-2022.11.18.금요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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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8.금요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묵시10,8-11 루카20,27-40

 

 

성전 정화

-날마다,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성사의 수행으로-

 

 

제 주변에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성인처럼 사는 아름다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저는 주저함 없이 성인이, 성녀가 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어제는 이렇게 성녀처럼 사시는 분이 부탁대로 제 졸저 두 종류의 책을 수도원 피정집에 비치할 수 있도록 충분히 제본해다 주었고, 또 한 권의 책도 제본을 부탁했습니다.

 

모두가 사제생활 초창기 90년대 전후에 썼던 강론집에서 좋은 부분을 발췌하여 좋은 분들이 협력하여 내 준 책들로 수도원 피정집 방마다 비치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새삼 진리는 변함이 없이 늘 반짝이는 빛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30년전 강론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된 책들인데 지금도 끊임없이 찾기에 제본을 실행한 것입니다. 

 

기존의 책보다 책도, 글자도 커서 돋보기 없어도 볼 수 있어 너무 흡족한 마음에 어제는 하루 내내 행복했습니다. 책 세 권의 제목이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같아 잊혀지지 않습니다

 

1.“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둥근 마음, 둥근 삶”

3.“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바로 다시 피정집에 비치할 책 제목들인데, 참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이 ‘둥근 마음, 둥근 삶’에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지막 한 권의 책을 출판한다면 제목은 무조건 제 좌우명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하고 싶습니다.

 

정말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만 34년 하루하루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을 것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삶을 단순히 집중하여 오늘 지금 여기를 살 때 환상이나 거품은 걷히고 본질적 깊이의 삶입니다. 모두가 하루하루의 삶에 공감을 표하며 동의하곤 합니다. 예수님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음을 봅니다. 루가 복음의 예수님 삶에 자주 나오는 말마디가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주십사’라는 주님의 기도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마디를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도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희 두고 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 좋아하는 기도문중, ‘날마다’와 ‘하루하루’ 두 말마디가 들어 있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강론에도 얼마나 많이 인용했는지, 그러나 인용할 때 마다 새롭고 좋고 감동적입니다. 사실 고백성사후 보속으로 이 두 기도문을 소리내어 읽게 하면 많은 분들이 읽는 도중 목이 메어 읽지를 못하는 경우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순수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하는 것이 구원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예루살렘을 보시며 그 타락상에 우시던 예수님은 나약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음이 오늘 삶의 현장에서 입증됩니다. 강렬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성전정화의 행동에 돌입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천둥같은,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세상의 중심이자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해야 할 하느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말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이 속화되는 것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구체적 성전정화를 실행하십니다. 본연의 말씀 가르치심에 전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이보다 더 좋은 성전정화의 수행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배움에 더하여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를 바치고 성사를 거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성전정화도 없을 것입니다. 

 

보이는 성전만이 성전이 아니라 건물 성전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몸 공동체의 성전, 그리고 하나하나 각자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기도 하니 말그대로 성전의 삼중적 차원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말씀수행, 기도수행, 성사수행이 한결같이 동시에 이 세 차원의 성전을 정화하고 성화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정화와 성화는 물론 우리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같은 존재가 됨으로 저절로 존재론적 복음 선포가 되어 세상을 날로 정화하고 성화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성전정화의 최선, 최상의 길은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성사 수행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수행과 더불어 저절로 기도의 생활화, 회개의 생활화도 이뤄질 것이니 성전은 늘 깨끗하고 거룩할 것입니다. 이래서 성전에서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수행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적대적인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반응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십니다. 빛과 어둠처럼, 인생에는 이런 어둠만이 있는게 아니라 빛도 늘 우선함을 깨닫습니다. 민심은 천심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보호하는 빛처럼 온 백성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으니 적대자들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 인생은 빛과 어둠, 단맛과 쓴맛이 함께 합니다. 이런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평범한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바로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묵시록의 요한의 신비로운 영적체험이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작은 두루마리가 상징하는 바, 바로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씀의 두루마리를 천사에게 선물로 받을 때 천사의 말입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요한이 천사의 손에서 작은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니, 그것이 입에는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다 합니다. 이어 요한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명령입니다. 바로 단맛과 쓴맛,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생이요 세상이요 이런 인생을,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말씀맛, 하느님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시편의 화답송 고백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달콤한 꿀맛같은 말씀맛이, 말씀의 힘이 인생 쓴맛을 상쇄하며 우리 모두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며 살게 합니다. 말씀을 모시고 말씀과 하나되어 산다해도, 어둠과 쓴맛의 세상은 여전할 것이나 우리는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이들을 돌파해 갈 것입니다. 결코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살게 할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세상의 중심이자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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