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새로운 시작, 절망은 없다” -희망하라, 찬미하라, 인내하라-2022.11.24. 목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1785-1839)와 116명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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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4. 목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1785-1839)와 116명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묵시18,1-2.21-23;19,1-3.9ㄱㄴ 루카21,20-28

 

 

 

“끝은 새로운 시작, 절망은 없다”

-희망하라, 찬미하라, 인내하라-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라.”(루카21,18-19)

 

어제 복음 마지막 말씀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막연히 꾹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선善안에서, 기도안에서, 섬김안에서 항구히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11월 아침 산책때 마다 즐겨 부르는 기도이자 노래입니다.

 

“성인들이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가요.”

 

연중 마지막 34주간이 참 고맙고 좋습니다. 수도원 연피정 주간으로 그대로 오아시스 주간입니다. 피정 강의는 ‘천국의 사다리’ 동방영성고전을 바탕한 내용들입니다. 저의 독서 스타일은 식사와 같습니다. 좋은 책만 보면 행복해 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듯이, 게걸린듯이 책을 읽습니다. 피정기간 독파를 목표로 하고 맹렬히 읽는 책은 ‘천국의 사다리’, ‘울림’, ‘백석白石 평전’ 세권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제 연중 34주간이 끝나면 다음주 부터는 기다림의 기쁨이 넘치는 대림의 시작입니다. 배밭농사 역시 끝이자 새로 구덩이가 파지고 거름을 넣게 되니 또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삼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 듯 합니다.

 

오늘은 베트남 순교 성인들 축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이 그렇게 많은 베트남인지요! 민족적 자존심이, 자부감이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여러 제국을 물리친 흔치 않은 나라입니다. 중국을, 프랑스를, 그리고 미국을 물리쳤습니다. 미국을 물리친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합니다. 18-19세기 우리 보단 적지만 무려 1만여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입니다.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가톨릭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우리는 오늘 18-19세기 양세기에 걸쳐 순교한 117명 베트남 성인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들 순교성인들중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포함한 96명은 베트남인들이고 나머지 21명은 유럽 출신들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만이 아실 무명의 순교자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극단의 온갖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견디어 냈고, 영웅적으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당시 베트남 현실은 민중들눈에는 재앙과 불행의 시기로 흡사 종말같은 암흑같은 예측 불허의 분위기였습니다. 바로 이런 칠흑같은 어둠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이 환히 밝힌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전조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의 우리 조선과도 흡사했습니다. 18-19세기 박해시대 2만여명의 순교자를 낸 조선땅 역시 칠흑같은 암흑에 종말의 지옥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를 기록한 20여권의 실록을 읽은 후의 느낌은 한권이면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잔인한 보복으로 점철된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였기에 한권만 읽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홍명희의 10권의 임꺽정 역사소설을 읽으면서도 역시 한권이면 족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악순환의 반복이요, 인권이 무참히 유린된 역사였습니다. 완전히 칠흑같은 어둠속에 반복된 악순환의 역사요,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이 어둠을 밝힌 것입니다. 인권 증진과 신장에 그리스도교의 역할을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전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 인류의 빛입니다. 어둠중에 방황하던 베트남과 조선땅의 사람들이 마침내 빛인 그리스도를 만난것입니다. 이어 들불같이 번진 순교자들의 대열입니다. 이미 빛을 보았기에, 하늘을 보았기에, 미친 듯이 열광한 민중들이요, 그 누구도 빛의 대열, 빛의 순교자들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조선실록을, 임꺽정 소설을 읽으면서 캄캄하고 답답했던 것은 빛의 부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해선 결코 안됩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끝까지 인내로이 견뎌낼 때 생명을 얻습니다. 문이 닫혀 있으면 그 옆에는 희망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절망의 벽은 희망의 문으로 변하니 이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를 증거합니다. 복음은 예수살렘의 종말과 더불어 세상의 종말인 듯 했지만 새로운 구원의 도래의 시작입니다. 종말의 심판과 더불어 구원의 도래를 복음은 장엄하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자 희망입니다.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궁극의 희망을, 믿음을, 사랑을 둘 때, 항구한 인내도 가능합니다. 저절로 ‘희망하라, 인내하라’는 권고를 하게 됩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바빌론의 패망은 장차 있을 로마제국의 멸망을 상징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 바빌론이!”

 

사실 로마제국의 멸망을 목격하면서 눈감을 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세상의 종말인 듯 생각했다 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게르만족의 개종으로 새로운 그리스도화된 유럽이 시작됩니다. 새삼 끝은 새로운 시작이요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바빌론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멸망은 바로 하느님의 승리를 나타내며 이어 천상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찬미가입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과연 그분의 심판을 참되고 의로우시다.”

 

에 이어지는 오늘 독서에는 생략됐지만 승리의 찬미가(묵시19,1-7)를 우리 가톨릭 교회는 매주 주일 제2저녁 기도때 마다 바칩니다. 새삼 천상전례의 반영이 교회가 바치는 지상전례임을 깨닫습니다. 천상의 행복을 앞당겨 살게하는 지상전례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이런 천상에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저절로 하느님의 승리를 앞당겨 찬미하게 되고 저절로 인내할 힘도 생깁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묵시19,9ㄴ)

 

제1독서 묵시록의 후반부 말씀인 화답송 후렴이 참 은혜롭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어린양의 천상 혼인잔치를 앞당겨 체험하는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힘, 찬미의 힘, 인내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힘차게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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