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대림 제1주간 목요일 이사26,1-6 마태7,21.24-27
반석 위의 인생집
-주님의 말씀(뜻)을 실행하는 슬기로운 삶-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가끔 인용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언젠가 수도원 피정중인 형제가 “신부님은 여기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사느냐?”물었습니다. 저는 지체없이 대답했고 지금 물어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삽니다. 기도 맛으로, 말씀 맛으로, 즉 주님 맛으로 삽니다.”
사실도 그러하지만 설상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과감하게 고백으로 던져 놓는 것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그렇습니다. ‘사랑한다’, ‘믿는다’ 역시 고백으로 던져 놓고 나면 언젠가 그대로 사랑하게 되고, 믿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은총이 하시는 일입니다.
도대체 수도자에게 이런 찬미의 맛, 기도 맛, 말씀 맛, 즉 주님 맛 아니곤 어디서 궁극의 맛을, 기쁨을 찾을 수 있을런지요. 이건 수도자만이 아니라 궁극의 진리를 찾는 이에게 공통적일 것입니다. 나중 남는 것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먹는 맛으로, 먹는 재미로, 먹는 기쁨으로 산다는 말도 들은적이 있을 것입니다. 먹는 것뿐 아니라, 맛을 찾기로 하면 일맛, 사람 만나는 맛, 술맛, 성性맛, 도박맛, 인터넷 맛 등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래서 중독입니다. 뭔가 중독되지 않으면 무미건조한 광야 여정 살아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온갖 중독 환자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래서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요 괴물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사실 인생 광야 여정도 성인, 폐인, 괴물로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인생의 참맛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바로 주님 맛, 말씀 맛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이래서,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실천하고자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 배움은, 공부는 평생이요 죽어야 끝나는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심판의 그날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이 때는 이미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그날의 심판날은 죽음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좋을 대로, 자기 식대로 살아 온 일방적 짝사랑의 삶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경청함으로 주님의 뜻을 찾는 공부에 소홀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래서 사랑의 침묵이요 사랑의 겸손입니다. 늘 내적 침묵중에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재차 강조하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 자명하여 새삼 설명이 필요없어 보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집은 반석 위인지, 모래 위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주님의 산상설교중 결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계속된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반석 위의 인생집은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과정입니다. 주님 은총과 더불어 늘 깨어 노력해야 합니다. 방심으로 서서히 안으로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리모델링은 물론 늘 새롭게 시작하는 분투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평상시는 모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반석 위의 인생집입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서원중 으뜸 서원인 정주서원이 목표하는 바도 바로 주님 말씀을 실행하며 주님 반석 위의 인생집을 짓는데 있습니다. 주님 반석 위에 세워진 정주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이요 수도자들입니다. ‘베네딕도의 평화(pax benedictina)’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정주의 수도자는 물론 정주의 신자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주님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26,3-4)
어제 고백성사를 본 자매님에게 이 말씀을 보속 처방전으로 써드렸을 때 말씀의 위로와 격려에 눈물 글썽이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새삼 주님의 뜻을, 말씀을 실천하는 데, 즉 말씀 실천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에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 그리고 훈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모래 위의 인생집, 사상누각에 대한 설명이 너무 실감이 납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여지 없이 무너져 내리는 참 어리석은 모래 위의 인생집들입니다. 과연 우리 나라는, 우리 사회는, 우리 가정 공동체는, 내 삶은 모래 위의 집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 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내적으로 무너져 내리면 아무도 도와 주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외적의 침입으로 망하기 보다는 내부의 부패와 타락, 분열로 망했으니 그대로 모래 위의 나라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사회나 가정 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태원 참사로 158명의 꽃다은 젊은이들이 죽은 사건도 우리 사회가 흡사 모래 위의 집처럼 참 허술하게 보여집니다. 극단의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이 나라도 흡사 모래 위의 집처럼 허술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선 내 자신부터,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냉철히 성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 반석 위에 우리 인생집을 건축하는 보수(리모델링) 하는 절호의 시기입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반석 위의 인생집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시편118,25-27ㄱ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