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開眼의 여정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2022.12.2.대림 제2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0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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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사29,17-24 마태9,27-31

 

 

 

개안開眼의 여정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14)

 

무지의 인간,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무지로 인한 온갖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불가에서의 탐진치(貪瞋癡;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三毒)도 바로 무지의 인간임을 말해줍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눈먼 두 사람은 바로 우리의 모습으로 무지의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참 많이도 강론 주제로 등장한 무지입니다. 동방영성에서 제가 배운 귀한 가르침이 마음의 병이라 칭하는 무지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병은 마음의 무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원죄原罪나 불가에서 말하는 무명無明도 바로 무지한 인간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지식이나 정보의 결핍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마음의 무지입니다. 언젠가 소개한 마음의 병인 무지에 대해 다시 나눕니다. 

 

첫째 망각입니다. 마음이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늘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에 영적 훈련의 수행들입니다. 

 

둘째, 마음의 딱딱함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해도 도저히 마음을 뚫을 수 없습니다. 즉 세상사에 빠지는 것, 육체적 쾌락에 집중하는 것, 부에 사로잡히는 것, 셋이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세 욕망들입니다.

 

셋째, 눈멈입니다. 마음이 완고함으로 고통받을 때,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고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할 수도 없는데 이것이 눈멈입니다. 눈떳다고 하나 탐진치貪瞋癡에 눈먼 영적 소경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두 눈먼 사람이 우리 무지한 인간을 상징합니다.

 

넷째, 무분별입니다. 마음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모든 마음의 병들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병들이 솟아나는 우선적인 병은 무지와 하느님의 망각입니다. 사람이 내적 자아를 만나 안에 있는 신적 실재를 발견할 때, 이들은 저절로 마음의 병들로부터 치유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참나를 발견할 때 무지의 치유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의 치유입니다.

 

이래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이래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두 소경은 우리 눈먼 무지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싶은 갈망의 믿음은 근본적 영적 욕구입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도 결국은 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한 공부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복음의 두 눈먼 소경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쁜 소식, 복음인지요!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이사29,17-19)

 

그날이 바로 예수님과 만나는 오늘입니다. 바로 대림시기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장면을 상징합니다. 두 눈먼 소경은 눈은 멀었지만, 내적 눈은 주님께 대한 갈망의 믿음으로 열려 있음을 봅니다. 바로 이런 내적 갈망의 믿음이 있어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무지의 눈은 열립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로 우리가 미사 시작하면서 바친 자비송입니다. 참으로 집요하게 자비를 청하는 두 눈먼 소경에게 주님은 묻습니다. 소원이 간절하면 문답도 짧고 순수합니다. 예수님과 두 눈먼 소경의 대화가 바로 그러합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혼자가 아닌 도반처럼 함께 한 두 눈먼 소경들이 상징하는 바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예, 주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간절한 믿음의 갈망에 주님을 만나 은총으로 무지의 눈이 열린, 두 소경입니다. 사람들의 불건전한 호기심을 경계한 주님은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라고 단단히 이르셨지만, 눈이 열린 두 소경은 기쁨에 벅차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리니 복음 선포자로 돌변합니다.

 

두 눈먼 소경의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의 믿음이 있어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믿음과 은총이 만남으로 눈이 열린, 개안한 두 소경입니다. 한 두 번 주님과의 만남으로 무지의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가야 비로소 무지의 치유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날로 눈이 열려가는 ‘개안開眼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을 만나 강론할 때 제목은 무조건 ‘개안의 여정’으로 정합니다. 불가의 용어이지만 개안이란 뜻도 좋고 무지에서 벗어나는 개안은 평생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육안의 시력은 날로 떨어져 어두워지더라도 영혼의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 자체이신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만남과 더불어 회개와 겸손, 자기를 아는 지혜에 날로 무지의 병은 치유되어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정성을 다해 믿음으로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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