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7.수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340-397) 기념일
이사41,25-31 마태11,28-30
하느님은 누구인가?
-언제나 우리를 먼저 초대 하시는 분-
제가 감명깊게 읽은 책이 시오노 나나미가 쓴 15권의 “로마인 이야기”입니다. 그중 14권의 표지가 특이합니다. 13권 까지는 황제가 표지 사진에 나왔는데 14권의 표지는 제목부터 별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제목과 더불어 황제가 아닌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암브로시오의 초상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를 통해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되었다는 사실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암브로시오의 이름 뜻은 그리스어로 ‘불멸不滅’이란 뜻인데 이름 뜻대로 불멸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현대의 인물로 지금 현존하는 성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인은 주교 서품 과정도 참 특이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섭리로 보아야 합니다.
많은 회중이 모여 주교 선출을 의논하고 있을 때 한 소년이 “주교는 암브로시오!”라고 외쳤고 민심은 천심이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암브로시오는 신자가 아니었기에 일주일후 세례를 받고 주교품에 오릅니다. 성인의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주교직의 수행중에도 그의 신학적 업적은 탁월하기에 그는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 성 대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로 불립니다.
참으로 영성적인 인물로 교회에 끼친 영향도 지대했고 강론도 유명했으며 많은 영적 잠언들은 지금도 여전히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 축일, 대축일, 성탄8부, 부활8부에 부르는 테데움, 사은 찬미가는 바로 성 암브로시오의 작품입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노를 결정적으로 회심시킨 인물로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중 암브로시오에 대한 감동적인 실화를 소개합니다. 언제 읽어도 새롭고 큰 깨우침을 주는 일화입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아주 짧은 시간뿐 이었지만,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 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도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되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았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소리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제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기로 하자면 그가 한가했어야 하는데 그가 그런 여유가 있는 경우는 좀처럼 눈에 띠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백성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그의 말씀을 주일마다 들을 뿐이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이 생생한 증언을 통해 성 암브로시오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 암브로시오의 죽음을 앞뒀을 때의 감동적 임종어입니다. 그가 얼마나 죽음을 갈망하여 주님께 가고 싶어했는지 깨닫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참 좋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인은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찾아오시는 대림시기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찾는 하느님”도 있습니다. 25년전 써놓은 짧은 자작시도 이런 진리를 함축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활동의 나무가 아닌 관상의 호수가 되어 오시는, 함께 계신 주님을 모시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우리를 찾아오시고 초대하시어 우리를 만나주시고 한없는 은총을 내려 주시니. 바로 이 대림시기가, 이 미사시간이 바로 그러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바빌론 유배중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유배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이들의 신앙을 환기시켜 새롭게 하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고 이런 희망의 하느님을 만나라는 초대입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말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이렇게 바빌론 유배중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는 이스라인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다음의 주님의 자기 계시가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장엄하게 고백됩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무수한 성인들,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런 하느님을 만난 분들입니다. 87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피곤한 기색은 결코 찾을 수 없고 늘 미소띤 모습입니다.
제1독서에 오늘 복음도 주님의 초대가 선행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뿐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물론 오늘날 고단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초대를 상징하는 미사전례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유일한 영혼의 쉼터이자 샘터요 배움터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세상에 이런 초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영혼 깊이에서는 이런 주님을 찾습니다. 흡사 제1독서의 하느님을 연상케 합니다. 고해인생이란 말처럼 삶은 끊임없는 영적 전쟁이자 무거운 짐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전쟁은 평화로 짐은 선물로 변합니다.
그러나 결코 값싼 안식은 없습니다. 주님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 주님께 배우고 훈련해야 할 온유와 겸손의 수행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날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온유와 겸손에 영혼의 안식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의 세례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바로 주님의 멍에를 상징합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께 주님의 배움터 인생에서, 교회에서 부단히 온유와 겸손을 배워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 때 진정한 안식이요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변합니다.
인생 짐을 인생 선물로 전환시키는 방법은 이길 뿐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당신의 샘터이자 쉼터이자 배움터인 이 미사전례에 초대해 응답한 우리 모두에게 온유와 겸손,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지상에서 최고의 힐링센타가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