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4.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1542-1591) 기념일
이사45,6ㄴ-8.18.21ㅁ-25 루카7,18ㄴ-23
"오, 하느님!"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이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시편130.6)
한밤중 일어났을 때 저절로 떠오른 시편들입니다. 그대로 제 영혼의 고백같은 시편성구입니다. 저에게 하느님은 평생화두이자 저의 전부입니다. “오, 하느님!”, 23년전 수녀원 피정지도때 강의 주제였고, 아주 오래전 청담성당 대림 특강때 강의 주제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물론 모든 성인들에게 하느님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성인 빼기 하느님하면 남는 것은 허무요 무지의 어둠일 것입니다. 교회의 밤하늘에 별들같은 존재가 성인들이요, 성인들은 물론 내가 오늘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자체가 생생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은 늘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대신비가이자 대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학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극심한 빈곤과 궁핍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성인의 삶은 참 파란만장했으며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49년 짧은 생애였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원 개혁에 헌신하다 감옥생활등 죽음의 고비도 수없이 겪었고 1591년에는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12월13일밤 선종합니다.
성인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중 한분이며, 영성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카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이 유명합니다. 요한은 1675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위해 시성되었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詩人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살아서보다도 죽어서 영원히 살아있는 성인들입니다. 교회가 잊지 않고 적절한 하느님의 때에 맞춰 시성하고 교회학자로 선포하여 신자들이 보고 배우게 하는 자상한 배려가 참 고맙고 놀랍습니다.
성인을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성인답게 살라고 촉구하는 성인 기념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참 나의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읽은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와 한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사자성어는 1.과이불개(50,9%);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 2.욕개마장;덮으려고 하면 더욱 드러난다(14,7%), 3.누란지위(13,8%);여러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 문과수비(13,3%);과오를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잘못된 행위에 순응, 군맹무상(7.4%);눈먼 사람들이 코끼리를 더듬으며 말함의 순서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없는 무지의 인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지혜의 결핍입니다. 오랜만에 읽은 “녹(綠)의 미학(김상미1957-)”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란 공기”-
세월흘러 나이들어가면서 누구나 겪는 실존적 체험이 영육의 녹슴, 사랑의 결핍, 쓸쓸함, 외로움일 것입니다. “쓸쓸해서 사람이다”, “외로워서 사람이다” 라는 정의도 어울립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깨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만나 체험하며 사는 우리 수도승들에게는 녹틀 틈이 없이 늘 반짝이는 영혼입니다. 사실 저는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 불암산 기슭에서 34년 동안 정주하면서 원망, 절망, 실망한 적도 거의 없습니다. 다만 답답하고 막막할 때는 하느님을 뵙듯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다본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입니다. 아마 저만큼 불암산과 하늘, 하늘의 별들을 많이 본 분들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향한 그리움도 없습니다. 주님과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쓸쓸함, 외로움, 그리움은 생명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초대같습니다. 장익주교님의 김수환추기경님에 대한 언급도 생각납니다.
“저는 추기경님이 고독해 하시는 것을 뵌적이 있지만 외로워하거나 쓸쓸해하는 모습은 한번도 뵌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이사야에게 하느님은 너무나 자명한 존재였고 그 고백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체험할 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지만 허기 가득한 끝없는 빈 가슴은 살아 계신 하느님만이 채울수 있습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이 되게 하는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아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이사45,6ㄴ-8.18.21-22)
얼마나 고무적인 하느님 고백인지요! 너무 단순명료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온힘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며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깨어 있는 삶, 끊임없는 하느님 공부, 성경 말씀 공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체험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이 우리가 오시길 기다리는 메시아 그분인가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던 때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죄도 병도 많은 시절입니다. 아니 날로 늘어나는 온갖 병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육신은 물론 영혼과 정신, 마음의 질병과 병고로, 또 갖가지 무지와 탐욕, 분노, 질투, 광신에 눈멀어 악순환의 반복을 살아가는 지요! 참으로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이사야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이런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지요!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온전한 전인적 총체적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느님대신 예수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인간이 병病이라면 예수님은 치유 약藥입니다. 인간이 병자病者라면 예수님은 명의名醫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어 참나의 온전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적 권고중 하나입니다.
“그대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에,
다른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