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의 삶 -사랑의 ‘신비가神祕家’로 삽시다-2022.12.19.월요일 12월19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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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9.월요일 12월19일                                                                 판관13,2-7.24-25 루카1,5-25

 

 

 

하느님 중심의 삶

-사랑의 ‘신비가神祕家’로 삽시다-

 

 

 

“내 입은 님의 찬미로 가득 차 있고,

 진종일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시편71,8)

 

오늘은 대림2부, 셋째날인 12월19일입니다. 주님 오실날도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 옛세의 뿌리여(O Radix Jesse)”로 시작되는 간절한 M후렴도 반갑고 고맙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해야 겠다는, 하루하루 사랑의 신비가로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오 옛세의 뿌리여, 만민의 표징이 되셨나이다. 주앞에 임금들이 잠잠하고 백성들은 간구하오리니, 더디 마옵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요즘 성탄에 임박하여 많은 분들이 고백성사차 수도원 제 집무실을 찾습니다. 보속으로 다음 똑같은 말씀 처방전을 써드리며 충고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 형제님(필립4,4)” 성구를 써드린후 꼭 당부하는 충고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꼭 일주일 남았습니다. 일주일만은 화내지 않고, 짜증내지 않고, 큰소리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기쁘고, 평화롭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시다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비상한 신비가가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기쁨과 감사의 신비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불행과 비극은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잊은 데에 기인합니다. 하느님을 잃었는지, 잊었는지 구별이 애매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잃어, 잊어, 삶의 중심과 삶의 의미를 잃고,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며 표류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오소서, 주 예수님!”을 뜻하는 “마라나타”를 호흡에 맞춰 되뇌이며 바치기를 권하는 명상기도 제 강의록중 한부분을 소개합니다. 이 명상기도 또한 깨어 늘 주님의 신비가로, 관상가로 살기위한 영성 훈련입니다. 30년전에 쓴 내용인데 오늘날도 여전히 새롭게 읽힙니다. 신비가로 불림받은 우리 신자들에게 적절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명상기도는 수도승 영성이 보편화하는 시대에 깊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단순하고 평범한 기도로서 결코 신비롭고 유별난 기도가 아니라 참사람眞人’으로 살아가기 위한 단순하고 평범한 수행의 한 방법이며 순간순간 소중히 지내며 하느님의 현존인 사랑 안에서 깨어 살기 위한 기도이다. ‘행함의 기쁨(the joy of doing)’을 누리는 시간이 아니라, 존재의 기쁨(the joy of being), 관상의 기쁨(the joy of contemplation)을 누리는 시간이며, 생각을 멈추고 사랑의 침묵안에 머무는 시간이다.

 

신비가는 소수의 영적 엘리트에게 해당된 명칭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도달해야 할 본래 모습이요 모두가 그리로 불리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저명한 신학자 칼 라너는 '21세기의 문턱에 선 현대는 새 문명이 잉태되기 위한 전환기로서, 머지 않아 영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며 그때가 오면 신자들은 신비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한다.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 시대인 오늘날, 많은 이들은 외적 풍요와 편리함에 비례하여 극심한 영적 갈증을 겪고 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 영혼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지 못한다. 명상기도는 생명의 샘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요한15,4) 생명수를 흡수하여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는 기도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현실입니다. 오히려 영적 갈증은 날로 심각해집니다. 얼마전 친애하는 도반인 신부가 본당 신자들이 너무 좋아한다 하여 판공시 보속으로 나눠주겠다며 수백장의 행복기도문을 가져갔습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주님의 사랑의 신비가가 되고 싶은, 깊은 갈망이 잠재해 있음을 봅니다. ‘행복기도’ 혹은 ‘예닮기도’로 일컫는, 신비가의 고백처럼 생각되는  기도문 전문을 다시 소개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2018.10.16.

 

참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는 기도문입니다. 대림 2부, 주님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매일 바치며 주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서의 인물들 평범한 듯 하나 실상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비범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어제 복음의 주인공인 성 요셉이 주님을 만난 신비가였고,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계된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 역시 주님을 만난 신비가들입니다. 또 제1독서 판관기의 참 소박한 마노아와 그 아내 역시 주님을 만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중심의 수덕생활에 한결같이 지극히 충실할 때, 때가 되면 주님은 이들을 찾습니다. 수덕신비생활입니다. 수덕의 기반위에 비로소 꽃처럼 피어나는 신비생활입니다. 복음의 노부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 대한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바로 때가 되자 이들 신비가인 노부부를 방문한 주님의 가브리엘 천사였고 세례자 요한 아기의 출생이 예고되고 마침내 엘리사벳은 아기를 잉태하고 감격에 벅차 고백합니다. 요한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의 선물이 바로 요한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주셨구나.”

 

그러니 태교는 물론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키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했을 신비가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입니다. 판관기에서 마노아 부부를 통해 삼손의 출생도 신비스럽습니다. 이들 부부의 충실한 삶을 눈여겨 보신 주님의 개입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됐는데 이를 읽어보면 두 부부가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기도의 사람이자 신비가였던지 잘 알아챌수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에게 하느님 체험은 아주 일상적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잊고, 잃고 사는 지, 경종이 되는 성서의 가난한 신비가들입니다. 마노아의 아내 역시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마침내 주님의 천사가 아들의 출생을 예고합니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마침내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을 낳고 삼손이라 하였고,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느님은 이 부부에게 태양같은 아들 삼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삼손의 출생,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새삼 우연한 존재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의 신비가로 잘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주여, 내 믿는 데 당신이시고

 어려서부터 나의 희망 주님이외다

 

 어미의 품안에서부터 님은 나의 힘,

 모태에서부터 님은 내 의지시오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믿었나이다.”(시편71,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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