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의 삶 -산(山)처럼-2023.1.19.연중 제2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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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9.연중 제2주간 목요일                                                             히브7,25-8,6 마르3,7-12

 

 

 

하느님 중심의 삶

-산(山)처럼-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잠깨어 ‘자비의 집’ 숙소 문밖을 나서면 맨먼저 눈들어 바라보는 불암산과 북두칠성입니다.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제 사랑하는 요셉수도원입니다. 제 침실 창밖에는 불암산 정상이, 식당 창밖에는 불암산 기슭이, 집무실 창밖에는 불암산 봉우리의 동생 같은 ‘애기봉’이 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을 상징하는 늘 거기 그 자리의 산이요, 이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입니다. 오래 전에 써 놓은,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짧은 세 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작詩作의 가장 많은 소재가 된 불암산입니다.

 

-1.“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2.“산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등을 기대거나

  바라보면서

  

  늘 거기

  그 자리에 평화롭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1997.10.4.

 

  -3.“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1998.1.27.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움직이는 중심, 정주의 산같은 분이십니다. 얼마전 남편의 강력한 권유로 피정을 하고 떠난 자매와의 면담고백상담시 들은 말이 생생합니다.

 

“아, 여기 수도원은 진짜로 가득차 있어요. 텅빈 배밭같은데, 또 성전에 들어와도 주변 모두도 진짜로 가득차 있고, 주변의 겨울 환경 색깔도 수수하고 순수하기가 진짜입니다.”

 

이어지는 이 자매가 남기고 간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자고 일어 났더니 나무 가지마다 구슬이 가득 걸려 있더군요. 밤새 비가 와서 맺힌 것입니다. 구슬, 눈물, 저런 아픔이 있기에 나무가 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수도원은 고요하고 배나무는 말이 없고 새들은 지저귀고 시간은 충만한데 도대체 무엇으로 가득한가, 무엇으로 가득한가, 무엇으로 가득한가, 도대체 가득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가득한가 생각했답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조금 길이 보입니다. 그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께 묻고,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겠습니다. 불순한 피정자에게도 기회를 주신 주님께 영광드리옵니다. 고맙습니다. 2023.1.15. Agnes”-

 

나뭇가지에 달린 빗방울을 구슬로 눈물로 본 감성이 참 신선합니다. 더불어 언젠가 가을 이른 아침 풀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을 보며 쓴 ‘별꿈’이란 자작시와 자주 산책때 부르는 ‘아침이슬’ 노래중 참 곱고 아름다운 대목이 생각납니다.

 

4.“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미소를 배운다.”

 

텅빈 허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피정 자매님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이런 충만한 기쁨, 순수한 기쁨에 행복 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은 명실공히 예수님 활약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이는 중심이 되시어 당신께 가까이 오는 모든 이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면 엎드려 소리쳐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최상, 최고로 보호되는 우리 삶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복음 장면에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과 함께 하되 때로 외딴곳을 꼭 찾으셨고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다는 것이니 몇 대목을 소개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적절한 때 조용히 뒤로 물러가는 것도 분별의 지혜입니다.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에게 이르셨다.’

 

열광하는 대중을 얼마나 경계하셨는지 깨닫습니다. 사실 호산나 노래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호하던 똑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고 죽였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는데 이런 민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대중의 인기에 현혹됨이 없이 늘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습니다. 마침 예전에 썼던 ‘사랑은’ 시도 생각납니다.

 

-5.“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셨기에, 늘 이탈의 초연한 삶에 초월과 내재, 관상과 활동의 사랑의 삶을 동시에 사시며 늘 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읽은 두 글귀가 생각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한다. 그러나 환경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남보다 더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참 많이 강조한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선택과 훈련, 습관의 강조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타고난 것들, 주어진 것들에 마음 뺏기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날마다 용감히 지혜롭게 참 좋은 주님을 선택하여, 즉 주님의 기쁨을, 감사를, 행복을, 평화를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함으로 날로 주님을 닮아가자는 것입니다. 

 

절로 주변 환경은 변화되고 나는 부단한 자아초월로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고 비교로 인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주님을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자 초월과 내재의 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날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산처럼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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