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15.연중 제6주간 수요일 창세8,6-13.20-22 마르8,22-26
개안開眼의 기쁨,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만남-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116,12-13)
화답송 시편이 은혜롭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마음이 됩니다. 잘 들으라 있는 귀요, 잘 보라 있는 눈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은 영성생활의 기본입니다. ‘들어라’로 시작되는 베네딕도 규칙이요, ‘보라’ 자주 언급되는 성서에 말마디입니다. 그리하여 귀가 어두우면 보청기도 하고 눈이 어두우면 돋보기를 합니다.
색맹色盲이란, 문맹文盲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색깔을 분별 못하는, 색에 눈멈을 뜻하는 색맹色盲이요, 눈이 있어도 글자를 몰라 읽지 못함을 문맹文盲이라 합니다. 얼마나 답답한 색맹에 문맹이겠는지요. 참 다양한 눈멈입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에 눈멀면 보지 못합니다. 탐욕, 애욕, 질투, 분노, 집착, 어리석음 등 모두가 우리를 눈멀게 하는 무지입니다.
그러니 육안肉眼만 있는게 아니라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도 있고, 영의 눈인 영안靈眼도 있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날로 약화되도 심안의 시력은,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질 수 있습니다.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선물도 발견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나 탐욕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무지에 눈이 멀어 기쁨을, 감사를, 행복을 곁에 놔두고 슬프게, 불평하며, 불행하게 산다면 너무 어리석은 어처구니 없는 삶입니다. 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우리 영적 삶에서 개안의 기쁨은 절대적이요 개안의 여정이 참 소중합니다. 눈이 열려 ‘있는 그대로’ 실상實相을, 진상眞相을 보는 개안開眼이라면, 날로 마음의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하겠는지요. 바로 행복기도 다음 대목은 개안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얼마나 자주 인용했던 자작 행복기도이던지요!
“주님,
당신을 만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에 참으로 결정적인 것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바로 마음의 눈이, 무지의 눈이 열리는 개안인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릴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세례성사는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림을 상징하는 입문성사입니다. 바로 오늘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복음의 일화와 제1독서 창세기 노아의 홍수 역시 세례성사를 상징합니다. 초대교회와 초대교부들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이를 고치시는 내용이 은혜롭습니다. 바로 그 어디나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는 자리가 벳사이다입니다. 오늘 개안은 그대로 무지의 눈이, 마음의 눈이 열림을 상징하니 그대로 세례 은총입니다. 개안은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진행되니 그대로 개안의 여정을 상징하는 다음 복음이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바로 점진적인 개안의 과정은 그대로 우리 평생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날로 주님과의 만남과 더불어 함께가는 개안의 여정에 밝아지는 마음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례성사로부터 시작된 개안의 여정은 날마다의 성체성사, 주기적인 고백성사라는 두 평생 성사 은총이 날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게 합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도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대중의 인기와 호기심에 거리를 두는 예수님의 겸손한 면모입니다. 이처럼 평생 날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과의 만남중에 서서히 좋아지는 마음의 눈, 마음의 시력입니다.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질수록 주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한 참사람이 됩니다. 무지에 눈멀 때 괴물이요 폐인이 될 수 있지만 개안과 더불어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노아는 홍수의 와중에도 방주에 머물다 구원되니 그대로 물로 새롭게 태어난 세례성사의 구원 은총을 상징합니다. 역시 방주에서 나오는 구원의 여정도 점차적인 과정을 밟습니다. 얼마나 신중한 믿는 이의 처신인지 믿는 이들의 모범인 노아입니다. 세례의 구원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그의 첫 제사가 참으로 개안한 노아의 모습입니다. 말그대로 세례를 통해 신인류 노아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노아는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셨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짐이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큰 가르침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우리의 무지의 악, 무지의 어리석음, 무지의 탐욕을 각성케 하는 말씀입니다. 지속가능한 일상이 계속되리라는 주님의 확약의 말씀인데, 무지한 사람들의 탐욕으로 인해 기후위기를 초래함으로 공동의 집인 지구가 위협받고 있으며 지속 가능했던 순환의 삶이니 무너지고 있으니 이것은 순전히 무지한 인간탓입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우리 무지의 눈을 밝혀 주시어 생태적 회개의 실천에 더욱 분발 노력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시편116,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