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을 쌓지 마라 바벨탑을 허물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2023.2.17.연중 제6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1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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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17.연중 제6주간 금요일                                                              창세11,1-9 마르8,34-9,1

 

 

 

바벨탑을 쌓지 마라

바벨탑을 허물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시편33,12-13)

 

무지의 죄입니다. 반복되는 죄입니다. 죄의 악순환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죄의 현실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눈먼 무지의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 이어 노아시대의 죄로 인한 심판의 홍수, 노아를 통해 새로 시작된 삶이었는가 했는데 또 바벨탑을 짓는 죄를 되풀이 합니다. 흡사 거대한 괴물처럼 생각되는 바벨탑입니다. 두려움에서 기인한 바벨탑 쌓기입니다.

 

먼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 참 다양하고 깊습니다. 안팎으로, 알게 모르게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 본능상, 자기 보호 본능상 바벨탑을 쌓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바벨탑, 우상의 바벨탑, 교만의 바벨탑, 허영의 바벨탑, 명예의 바벨탑, 탐욕의 바벨탑, 이기적 에고의 바벨탑,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으면, 하느님을 잃으면 사람은 누구나 바벨탑을 쌓기 마련입니다. 마음 깊이 내재한 갈망, 불안, 두려움, 공허, 허무, 무의미, 무료함 때문에 바벨탑을 쌓습니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바벨탑의 제국들이 명멸했는지요! 도시마다 높이 솟은 거대한 괴물같은 고층 아파트들이 흡사 바벨탑을 연상케 합니다. 오늘날도 바벨탑 제국들의 역사는, 참으로 위태한 바벨탑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무지의 바벨탑에 반드시 등장하는 독재자들입니다. 무지의 독재자들이 꿈꾸는 바 무지의 바벨탑, 교만의 바벨탑 쌓기의 제국들입니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하니 획일적 집단을 이루기가 너무 좋습니다. 두려움의 본능상 함께 모이는 것은 필연입니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합니다. 그들은 이주해 오다가 마침내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습니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 한데 모여 도시를 건설하고 일치의 중심인 우상같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의 바벨탑입니다. 내적 공허와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대책이 고작 우상의 바벨탑, 무지의 바벨탑 쌓기입니다. 결국은 자멸에 이를 바벨탑을 쌓는 무지의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단의 개입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심판, 살리는 심판입니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심으로 바벨탑 중심의 눈먼 획일적 무지의 집단을 살리십니다. 그들은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고, 바벨탑 쌓기를 중단하고 온 땅으로 흩어집니다. 우상 중심의 세상에서 살다 보면 지배와 피지배의 상황은 재현되기 마련이며 여기서 노예상태의 사람들 또한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상실이요, 자기를 잃은 익명의 무명의 존재가, 1회용 소모품 인생 되기가 십중팔구입니다. 그러니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인 하느님 구원 사건의 쾌거가, 또 하나의 엑소도스 탈출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 참 깊고 두렵습니다. 마치 현대의 문명이 바벨탑 쌓기의 멸망으로 치닫지는 않는지 불길한 예감도 듭니다. 디지털 혁명이 추세라지만, 문명의 대세라지만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인간이 실종되어가는, 도태되어 가는, 퇴화되어 가는 추세가 불길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점점 일자리도 사라져가니 약하고 착한 보통 사람들이 살길이 막막해집니다. 자연이나 마을은 사라져가고 도시화와 더불어 무수한 고층의 아파트들에 사람들은 날로 왜소해져가고 죄도, 병도 많은 세상이 되어 갑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쌓기와 도시건설과 참 좋은 대조를 이루는 옛 광야같은 세상을 옥토로 만든, 야만의 유럽을 문명화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이들 수도자들이 먼저 광야에 머물렀을 때 한 일은 바벨탑 쌓기가 아니라 수도원을 세우고 성전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니 오늘 창세기의 바벨탑같은 우상 중심이 아니라 넓은 광야같은 유럽 대륙 곳곳에 하느님 중심의 도시들이 형성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수도원 도시들이 광야의 유럽 곳곳에 생김으로 거친 광야의 유럽은 옥토로 변합니다. 이래서 유럽인들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시토회, 트라피스트회 포함)가 유럽을 구했다 하여 베네딕도 성인을 유럽의 은인으로, 또 유럽의 주보 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 정주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역시 함께 살지만 공동으로 기도할 때와 식사할 때와 일할 때를 제외하곤 흩어져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 중심의 함께와 홀로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성의 일치를 이루는 유기적 공동체 삶이지, 결코 창세기의 바벨탑 중심의 획일화된, 단일화된 무기적 비인간화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니 살길의 답은 단 하나, 분명해졌습니다. 무지의 바벨탑을 쌓지 않는 것입니다. 무지의 바벨탑 쌓기를 중단하는 일이요, 우상의 바벨탑을 허무는 일입니다. 바벨탑 우상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길이요, 각자 삶의 자리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요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전쟁의 요체입니다.

 

그러니 바로 창세기 바벨탑에 대한 궁극의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예외없이 인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구원의 삶의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겠느냐?”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례여정의 삶을 살 때, 저절로 안주를 위한 내외적 바벨탑 쌓기는 중단되고 우상의 바벨탑도 허물어질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늘 나눠도 늘 새로운, 내적 우상의 바벨탑 허물기에 참 좋은 고백기도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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