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7.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1,10.16-20 마태23,1-12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섬김, 경청, 회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23,11)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봉사보다는 저는 섬김이라는 순수한 우리 말을 더 좋아합니다. 복음의 핵심적 요소가 바로 섬김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뿐일 것입니다.
“서로 섬기십시오”, 바로 이미 고인이 된 이 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의 사목 표어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진정한 리더십도 섬김의 리더십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복음의 사람, 성 베네딕도도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성규머리45-46)
학원보다는 역시 저는 우리말 배움터를 좋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바로 마산에 있는 여자 트라피스트회 수녀원 정문 기둥에 쓰여 있는 글귀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평생학인 수도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영어가 서비스(service)요, 섬김의 직무는 바로 서비스업임을 깨닫습니다.
서비스업하면 지금도 생생한 30년전 1인6역에 분원장직 소임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1990년대 중반에 제 나이도 40대 중반이었고 사제는 저 혼자였습니다. 1년 365일 혼자 미사와 강론, 신학교 강의, 면담성사, 손님접대, 전화받기, 주방책임, 분원장직, 참 분주했던 때였습니다.
당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전천후全天候로 뛰었고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결연한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종전불퇴의 충일한 정신으로 살 때 였습니다. 수도원 생존의 문제가 참 절박한 때였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자작 좌우명시도 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밤중 피정 신청 전화에 잠결에 퉁명스레 전화를 받았고 격렬한 항의를 받았고, 지체없이 사과하여 간신히 수습했습니다. 바로 이때의 전광석화같은 깨달음입니다.
“아, 나는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서비스업이라면 첫째, 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 편안해야 하겠구나. 음식점이나 병원, 학교를 보면 금방 들어나듯 주님의 서비스업인 교회나 수도원 역시 마찬가지다. 과연 주님의 서비스업 수도원에 속한 나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며, 영적 실력이 탁월하며, 수도원의 내외적 환경은 좋은가 자주 성찰해 봐야 하겠다.”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인성, 영성, 환경을 일컬어 주님의 서비스업 3대요소라 칭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결론같은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충고,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결론하여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바로 겸손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다투어 순종하라는 사부 베네딕도의 말씀이 있는데 참으로 다투어 섬기는, 다투어 겸손한 공동체라면, 참 멋진 주님의 복음적 공동체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참 좋은 주님의 복음적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경청과 회개의 삶이 그 답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강조되는 바 경청과 회개로 사순시기를 맞이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개인의 내적회개로는 부족하고 적극적 사회참여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에 충실함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경청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가 회개요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과 순종의 사랑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회개란 하느님 안 본연의 제자리로 돌아옴을 뜻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돌아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대상이 허영과 외적 삶에 치우친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하는바 당대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모든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모셔선 안된다는, 우상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바로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며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우리 삶의 중심은, 우리 공동체의 중심은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참 선생님인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충실함이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새삼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주님의 선언이 참 눈물나도록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론적으로 절대 평등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우상들을 배격, 배제하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겸손한 존재로, 우뚝한 존재로, 의연하고 당당하게 위축되지 말고 참자유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경청과 회개, 섬김의 겸손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경청과 회개, 섬김의 삶에 더욱 정진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