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 -공동체, 평화, 희망-2023.4.16.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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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6.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사도2,42-47 1베드1,3-9 요한20,19-31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

-공동체, 평화, 희망-

 

 

 

오늘 부활 제2주일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대희년을 맞이한 2000년 부활 제2주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사도’라 불리는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수녀를 시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제정했습니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20세기 격변의 상황을 돌아보며 “비극적 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비의 메시지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3년이 지난 2023년 지금도 여전히 갈수록 자비의 메시지는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도처에서 계속되는 전쟁에 내외적으로 계속되는 혼란한 상황이 하느님의 자비뿐이 답이 없다는 사실이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는 시대입니다. 말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잊어 자초한 재앙입니다.

 

한밤중 밤1:30분 강론 쓰다가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어제 키보드 청소하다 손상을 준 듯 강론을 쓰다 보니 키보드가 고장이 났는지 아무리 해도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 손으로 쓸때는 전혀 문제될리 없었지만 디지털 시대는 대책이 전무합니다. 

 

어쩔수 없이 이 방면에 전문가인 한밤중에 곤히 잠자는 원장 수사를 깨울수 뿐이 없었고, 쾌히 웃으며 잠깬 원장 수사가 자신의 키보드와 교체해 줌으로 강론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그대로 천우신조天佑神助, 구사일생九死一生, 강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형제애를 통한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한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한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그윽한 위로가 되는지요!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아무리 불러도 정겹기 한이 없는 가사와 곡의 화답송 후렴을 오늘 종일 기도 노래로 바치며 지내고 싶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셔라” 계속되는 후렴의 감미로운 시편 136장도 읽으며 감상하려 합니다.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홀로 당신만이 큰 기적을 하셨나니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136,1-4)

 

무려 26절까지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시편을 노래하면 깊은 감동에 젖게 됩니다.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수도자들입니다. 새삼 이런 주님의 자비도 공부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부단히 노래할 때 하느님의 자비는 온삶에 스며들어 자비로운 사람들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생과제도 단 하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의 심판도 자비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지요. 날로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겠습니다. 바로 자비가 영성의 잣대이자 심판이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참 좋은 자비의 선물에 감동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보답하려는 의욕도 충만해짐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 셋입니다.

 

첫째, 사랑의 공동체 선물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은총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사랑에 넘치는 아름다운 주님 자비의 공동체인지요! 순전히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활짝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원이 꿈꾸는 공동체입니다. 말그대로 자발적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세상을 꿈꾼 공산주의 혁명이었지만 언감생심, 하느님 자비의 은총없이는 어림없습니다.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집 저집에서 빵을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었다.”

 

참 아름다운 공존공생, 사랑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순전히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은총의 선물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숙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적극 참여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고 실천의 훈련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공동체에 대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자비의 배움과 훈련으로, 자비의 실천으로 화답해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상천국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니, 우리 수도공동체의 이상이자 희망이기도 합니다. 

 

둘째, 평화의 선물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을 다 소유했어도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의 선물이 절실합니다. 참평화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쟁취하거나 거금으로 사올 수 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임이 드러납니다. 자비와 평화의 주님이 임재하시면서 불신과 불화, 두려움의 벽은 활짝 열린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말그대로 벽이 변하여 문이 된 것입니다. 활짝 열린 문으로 평화와 함께 물밀듯이 들어오는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벽은 문이 되고 공동체 한 가운데 자리 잡으시고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크게 기뻐하니 평화에 이은 기쁨의 선물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와 더불어 선사되는 성령과 용서의 선물입니다. 성령과 용서의 선물이 평화 공동체의 완성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참으로 집요하십니다. 여드레 후에 마지막 남은 회의주의자 토마에게 나타나 그의 의심의 벽을 평화로 허물어 버리고 그의 고백을 받아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즉각적인 토마 사도의 감격에 넘친 고백의 반응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평화로 인해 이제 제자들은 평화와 기쁨, 성령과 용서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협조도 필수적입니다. 평화의 은총의 선물에 응답하여 우리 또한 평화를 배우고 공부하며 평화의 실천 훈련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역시 평생 평화의 배움. 평화의 훈련입니다. 산상설교중 참행복이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피스메이커(the peacemakers)”가 되라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the peacemakers)!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셋째, 희망의 선물입니다.

희망이 죽으면 이어 사랑도 믿음도 시들어 죽습니다. 그리하여 성서는 한결같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 합니다. 파스카의 희망,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기쁨이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최고의 선물이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희망이 없으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부패와 타락, 유혹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희망의 빛이 사라지만 바로 거기가 지옥이요 사람들도 품위와 향기를 잃고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파스카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희망입니다. 아니 하느님 자체가, 파스카 예수님 자체가 희망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전체가 ‘희망에 대한 감사’입니다. 희망 찬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우리를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게 합니다. 바로 희망은 기쁨과 평화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 평화입니다. 그러니 자녀나 이웃에게 희망을, 꿈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실질적 사랑인지 깨닫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인지 대부분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지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은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일이 없디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그분을 희망하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기에 시련과 고통중에도 충만한 기쁨중에 즐거워하는 베드로와 그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신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베드로입니다.

 

역시 희망도 우리의 최선을 다한 응답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우리 역시 끊임없이 희망을 배우고 공부하고 훈련하자는 것입니다. 희망의 배움, 희망의 훈련입니다. 매일 자비하신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두고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에 정성을 다함이 제일 좋은 희망의 배움, 희망의 훈련일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참 좋은 선물 셋을 선사하십니다. 사랑의 공동체, 평화, 그리고 희망입니다. 우리 또한 자비하신 주님께 끊임없고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삶으로, 평화와 희망의 배움과 훈련의 삶으로 충실히 응답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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