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14.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1894-1941) 기념일
신명10,12-22 마태17,22-27
분별력의 지혜
-사랑이 답이다-
순교성인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한 어제 읽은 “푸른하늘을(김수영;1960.6.15.)” 이란 시를 나눕니다. 주님의 전사로, 영적혁명가로 치열한 간고분투艱苦奮鬪의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수행자들이라면 즉시 공감할 것입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 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내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앞둔 오늘은 만 47세에 순교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20세기에 시성된 최근의 성인입니다. 폴란드인이자 꼰벤투알 프란치스코의 수도사제로 유난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강했던 성인은 성모신심단체인 성모기사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성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정복당한 폴란드에서 유대인을 숨겨주었다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끌려 갔으며 그곳에서 탈옥한 수감자를 대신하여 스스로 죽음을 자원하며 순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1982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에게 '자비의 순교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시성식을 거행합니다. 그는 수감자들의 주보성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죽음을 자원하든 장면은 늘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도망친 놈이 안 잡혔다. 너희중 10명이 저 아사감방에서 죽어야 한다”
수용소장은 10명을 .채워가고 있을 때, 그 대열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나는 안돼. 나는 죽을 수 없어. 내가 죽으면 나의 처자식은 어떻게 살란 말이냐?”
그 숨막히는 상황에서 포로들의 대열을 뚫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사람이 수용소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합니다.
“저 사형수 대신 내가 죽겠소. 나는 처자식도 없고 쓸모없는 사람이오.”
“도대체 너는 누구냐?”
“가톨릭 사제요.”
“좋다, 함께 가라!”
그리고 그는 아우슈비츠 아사 감방에서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니 그의 이름은 막시밀리안 콜베이다.-
사랑의 절정이요 분별력의 지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사랑은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사랑의 선택이, 사랑의 희생이 없었다면 콜베 신부는 성인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가요브니체크는 1995년 3월13일 9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콜베 성인의 영웅적 사랑이 널리 알려지도록 세계 각지에서 강연했으며 시복식과 시성식에도 참여했습니다. 콜베 성인의 사랑의 선택과 죽음의 결단이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그의 평상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반영입니다. 다음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얼마나 많은 이방인들, 이주민들이 살고 있는지요.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이방인들로 떠돌 때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었던 조상들의 모습을 상기한다면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무시도 많이 약화될 것입니다. 얼마전 지중해를 바라보며 난민들의 공동묘지가 됐다며 슬퍼하던 교황님 사진을 잊지 못합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온 난민이 지난해 9만명이며 9만명은 지중해에서 난파되어 수장됐다는 것이니 말그대로 지중해는 이들의 공동묘지가 된 것입니다. 참 부끄럽고 슬픈 현실이자 오늘날 전인류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두 번째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고,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합니다. 늘 당신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이어 부활에 궁극의 희망을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경천애인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셨던 주님이심을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고 살게 합니다. 오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문제를 주님은 이런 사랑에서 나오는 분별력의 지혜로 지체없이 해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전의 주인이기에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바친다 하시며 다음 같이 명쾌한 답변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숫가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모두가 주님의 것이며 전능하신 주님께는 기적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초점은 자연이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성전세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크게 잃는다는 사자성어가 생각납니다. 모든 덕이 어머니가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의 성취를 위한 세 필수적 전제 조건이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이라 하는데 균형감각이 바로 분별력의 지혜에 해당되겠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분별력의 지혜는 은총의 선물이자 사랑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가기 때문에 분별력의 잣대는 사랑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의 전사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바둑은 인생사의 축소판이라 합니다. 바둑의 십계명이라 할 수 있는 위기십결, 역시 삶의 지혜, 분별력의 지혜에 좋은 도움이 된다 싶어, 영적승리의 삶을 위해 필요하다 싶어 나눕니다.
1.부득탐승(不得貪勝) : 승리를 탐하지 마라
2.입계의완(入界宜緩) : 상대의 세력권에 깊이 들어 갈 때는 여유를 가져라
3.공피고아(攻彼顧我) :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보라
4.기자쟁선(棄子爭先) : 희생하더라도 선수를 쟁취하라
5.사소취대(捨小就大) :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6.봉위수기(逢危須棄) : 위기에 봉착하면 불필요한 것은 버려라
7.신물경속(愼勿輕速) : 서두르지 말고 신중 하여라
8.동수상응(動須相應) : 흐름을 타라
9.피강자보(彼强自保) :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자중하라
10.세고취하(勢孤取和) : 고립되었을 때는 화친하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을 주시어 우리 모두 삶의 현장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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