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여정 -"우리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다"-2023.8.28.월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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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28.월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일 

1테살1,1-5.8ㄴ-10 마태23,13-22

 

 

배움의 여정

-"우리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다"-

 

 

공부해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참으로 참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공부는, 배움은 필수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결코 절망하지 말고 힘차게 하루하루 주님의 평생 학인이 되어 공부해야 삽니다. 배워야 삽니다. 너나할 것 없이 삶의 배움터에서 초보자의 정신으로, 경청과 겸손, 용기와 실행의 정신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죽어야 졸업인, 살아 있는 한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학인이 되어 배우는 것입니다. 요즘은 시국에, 나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동요부르기 보다는 침묵중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흐르는 강이되어 시냇물 소리 들으며 시냇가를 걷습니다.

 

“꼭 하늘 비 내려야

 흐르는 맑은 물인가?

 하늘 비 없어도

 늘 깨어 끊임없이, 한결같이

 찬미 노래 부르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고 싶다

 찬미는 저렇게 하는 거다."

 

참으로 좌절이나 실망이나 절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학인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진정한 소망일 것입니다. 참으로 배우는 겸손의 자세로 마음을 열면 배울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매일 강론 쓰는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밤시간은 저에게는 참 좋은 배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제 주일 바티칸에서 삼종기도후 복음을 바탕한 교황님의 강론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삶의 행로에서 혼자가 아니다. 살아서 우리와 동행하는 그리스도는 현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 곁에 예수님이 계시니 불가능한 것은 없다.”

 

위 요지와 같은 강론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8.31-9.4일 까지 몽골 사목 방문에 즈음하여 “나는 모두에게 한 형제로서 몽골을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더불어 희망하기(Hoping Together)”란 여정의 모토도 멋졌습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교회공동체로 부터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제1독서 테살로니카 교회는 예수님 사후 20년후 바오로의 열심한 선교로 시작한 50년대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이보다 훨씬 뒤인 80년대에 세워진 유대개종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의 마태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눈먼 자들아!”

 

저주라기 보다는 예수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위선적 행태에 대한 주님의 탄식입니다. "행복하여라", 그 좋은 행복선언이 아니라 불행선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참으로 무지에 눈먼,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당대는 물론 작금의 교회지도자들, 신자들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분별력의 지혜를 상실한,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에 앞서 테살로니카 초대 교회의 모습은 참 순수하고 아름답고 이상적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의 증언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들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신망애와 인내의 참 복음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대목도 우리에겐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바로 우리는 바오로와 그 일행이 테살로니카 교회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는 신도들의 환대와 또 이들이 부활하시어 곧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한 갈망에 감동된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인지요! 마태복음의 교회 공동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마도 위선자들 같은 지도자도 꽤 많았던 마태복음의 교회같습니다.

 

오늘은 어제 성녀 모니카에 이어 그 아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참 배울것이 무궁무진합니다. 참 길다 싶지만 배우는 마음으로 나눕니다. 성인은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합니다. 약1600년전 분으로 향년 75세로 선종하셨지만 성인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로 일컫는 교회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창설자인 성인은 플라톤, 칸트와 더불어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로 진리의 연인이라 불립니다. 현재까지 성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철학자나 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성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타는 사랑”이었습니다. 쾌락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그야말로 불꽃처럼 사랑한 성인으로 그의 생애는 “진리를 향한 구원(久遠)의 불꽃”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도 성인을 자신의 첫 스승으로 인정했습니다. 토마스 성인이 집필한 내용은 위대하고 온전한 교과서나 어딘가 비인격적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자기 자신과 싸웠으며, 회심한 후에도 싸웠습니다. 이래서 성인의 작품은 극적이고 아름답고 살아있습니다. 성인의 획기적 전환점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와의 만남이요 이어진 회심입니다. “집어서 읽어라(Tolle,lege)!”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펴 읽은 로마서 13장13-14절 말씀에 회심한 성인은 나이 32세,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세례를 받습니다.

 

그 이후 시편 7장을 읊으며 선종까지 참 가열찬 분투의 노력을 다한 삶이었고 성인의 업적은 불가사의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애의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는 음식이었으며 온 삶 전부를 바쳐 진리를 사랑했습니다. 진리의 관상가가 아니라 진리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임이라 부르고 “임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임안에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다.”고백하면서 고백록을 시작합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그 진리를 만나자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고백했고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헌신의 여정을 살았습니다. 성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되는 고백도 감동자체입니다.

 

“오, 진리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옥에 티도 있듯이 프랑스 신학계의 거두, 하느님의 종 한스 우리스 폰 발타사르의 성인에 대한 객관적인 비평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아우구스티노의 결함이라면 구원역사의 형평성을 깨트렸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에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아담에 집중함으로 은총신학이 원죄신학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성인의 심판개념이란 오롯이 원죄로 정향되어 있어서 장차 오실 구원자의 존재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부께서 모든 심판 권한을 넘겨주신 바로 그 구원자 말이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아우구스티노가 지옥에 대해서 단언한 그 모든 지식이 어디에서 왔을까? 신국론은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구원받을 이의 수보다 멸망할 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말은 무책임한 하나의 신학적 타락이다.”

 

이런 부정적이 면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위대함은 영원합니다. 서양철학을 플라톤의 각주라 한다면 가톨릭 신학은 아우구스티노의 각주라 하기도 합니다. 성인의 주옥같은 어록중 일부를 나눕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바로 이에 근거히여 제가 늘 강조해온  '좋은 선택-훈련-습관'이란 영적도식의 진리입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부정의한 법은 법이 아니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마라.”

“참다운 행복이란,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그리고 당신을 위한 기쁨이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온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
여기서 연상되는 제가 참 좋아하는 영어 말마디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의 정도도 그러하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겸손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듣고 배워야 할 삶의 스승들을 만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끊임없이 한결같이 듣고 배워 용기있게 실행하는데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은혜를 청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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