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6.금요일 성 브루노 사제 은수자(1032-1101) 기념일
바룩1,15ㄴ-22 루카10,13-16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성령은 우리를 침묵과 경청으로 인도한다.”
“침묵과 경청, 성령이 말하게 하라.”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말마디가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회개 역시 성령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의 여정에,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참사람이 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평생성사가 성체성사요 고백성사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한두번의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끊임없는 회개에 성체성사와 고백성사의 수행입니다.
무지한 인간, 인간에 대한 부정적 정의입니다. 마음의 병중 으뜸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등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무지입니다. 정말 극단의 이념에 중독되어 상대방을 극도로 혐오, 증오, 저주하는 댓글들을 보면 무지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광신이 얼마나 치명적 무지의 병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래서 참으로 강조하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이런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뿐입니다.
“가기싫다!”
거의 십여년 동안 로마에서 공부하다 잠시 귀국하여 수도원에서 3개월 쉬다가 어제 다시 출국한 수도형제가 엊그제 큰 소리로 고백한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길게 느껴지던 3개월도 순간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아,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죽기싫다!”
길게 느껴지던 인생도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할 때 대부분 저절로 터져나오는 말마디일 것입니다.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 고백한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어와,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기다리고 있었네.” 침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어떻게 이런 준비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요? 어제 깊은 애정과 신앙으로 군인들을 상담하는 일을 책임감있게 수행하는 어느 자매로부터 긴박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옆 부대의 젊은 20대 하사 군인이 자살하여 연미사를 청하는 전화였습니다. 한참 살아야 할 젊은이들의 이런 자살 소식을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전화를 준 자매는 퇴근하자마자 저녁미사에 참석했고 끝기도때까지 성전에서 기도하다 떠나던 모습이 또 눈에 밟힙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나에게 있고 답은 내 안의 하느님께 있습니다. 바로 문제의 답은 회개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죽음을 위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역시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필요합니다. 수도생활은 결코 유난한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고 항구한 회개의 삶을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사람이 됨을 목표로하는 수도생활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수도성인들이요, 오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브루노도 이에 속합니다. “위대한 침묵” 영화에서 소개된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창립자 성 브루노입니다. 1032년경 독일 퀼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수도원 창립자로 1101년 선종때까지 참 치열한 회개의 여정을 살았던 수도성인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교육받은후 사제품을 받고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교수겸 학장으로 재직중 성직매매로 추문을 일으킨 라임스의 주교 마나세스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마침내 마나세스는 사임했고 이어 대주교가 되어 달라는 라임스 교구민들의 바람을 뒤로한 채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고 본격적 은수자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몇몇 동료와 함께 노동과 관상기도의 생활을 하면서 기도소와 개인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면서 엄격한 고독과 침묵, 가난을 실천함으로 카르투시오회의 시작이 됩니다. 성인은 수도회를 떠나 잠시 성직자들의 개혁을 담당하는 교황의 보좌로서 얼마동안 활동하다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설득하여 다시 수도원에 돌아와 선종때까지 계속 은수생활을 합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자들의 삶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은 1.하느님을 찾음, 2.복음적 증거, 3.숨겨진 삶으로, 세상 속에서 관상생활을 추구하는 샤를로 후코의 후예들인 예수의 작은 형제회의 영성과 일치하니 이 또한 참된 회개의 열매이겠습니다. 브루노 성인은 공적인 명예를 취득하지 않는다는 카르투시오 규칙에 따라 시성식은 치러지지 않았고, 1674년 교황 클레멘스에 의해 축일만 공포됩니다.
회개의 여정을 살아감은 믿는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에 대한 주님의 예언자적인 깊은 탄식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고을을 향한 “불행하여라!” 불행선언은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회개에 대한 마지막 호소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부정적 현실은 계속 반복되는 듯 하니 무지한 인간의 숙명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럴수록 절박해지는 회개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우리의 회개에도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비단 주님의 사람인 성직자의 강론 말씀뿐 아니라 이웃 형제들의 말에도 회개의 열린 마음으로 경청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런 경청의 영적수행에 충실할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겠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참된 말은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에게까지 뿌리를 두고 있음을 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어제 미사중 화답송 시편 19장 일부 구절들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금보다 순금보다, 더욱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다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런 주님 말씀에 맛들일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런 주님 “말씀”과 더불어 “기도”가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말씀과 기도의 수행이 회개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바룩서의 참회의 기도는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지요!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일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얼마나 진솔한 회개의 고백기도인지요! 하느님을 떠나선 회개와 겸손도, 참미와 감사도, 지혜와 자비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선 참나도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회개가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참된 겸손과 지혜의 참사람이며 회개없이는 무지에서 벗어날 길이 요원합니다.
그러니 평생을 살아도 참자기를 모르고 헛된 삶을, 괴물과 악마, 폐인의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를 통해 참사람이 되는데, 하느님과 관계를 깊이하는 데, 기도와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에, 평생 영성 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이 “회개-기도-말씀-성체”를 담고 있는 미사입니다. 세상에 미사은총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 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바3,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