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6.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로마11,29-36 루카14,12-14
연민과 겸손의 바다같은 신비가
-오, 자비와 지혜, 신비의 하느님이여!-
"주께서는 희생보다 자비를,
번제보다 지혜를 원하시나이다."
독서의 기도 세번째 후렴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자비와 지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신비, 사랑의 신비, 삶의 신비, 죽음의 신비, 생명의 신비, 자연의 신비, 몸의 신비, 인간의 신비, 고난의 신비등 끝이 없습니다. 모두가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도대체 신비아닌 것이 없고 은총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신비에 대한, 은총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마냥 겸허하게 합니다. 신비의 원천인, 신비의 신비이신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교황님의 신학에 대한 언급이 참 신선했습니다.
“신학은 오늘날 세상을 위해 복음을 해석해야 한다. 신학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이선 안되고 영적이어야하는 훈련이다. 자신의 무릎을 꿇고 수행해야하는 흠숭과 기도를 통해 잉태되는 초월적 훈련이요, 동시에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훈련이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의 신학자라면 기도의 사람, 사랑의 신비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신비가로 불림받았다 함이 맞습니다. 참으로 신비감각을 키워야할 우리들입니다. 제가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36년째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하늘과 불암산이요, 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참 많이 인용했던 “하늘과 산” 이라는 자작시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을, 산은 인간인 저를 상징합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시를 쓴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외울때마다 새롭습니다.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소망하며 쓴 시입니다. 요즘 단풍의 곱기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수도원 주위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숙소문을 열었을 때,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오는 단풍 아름다운 풍경이 별세계 같습니다. 저에겐 하늘나라 체험이요 속으로 되뇌어 봅니다.
“이승의 세계가 이처럼 아름답다면 천국의 하늘문이 열렸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승의 아름다움은 이런 천상세계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천상고향에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 일이다.”
아주 오래전 25년전 이맘때쯤 써놨던, 하느님이 그리울 때 마다 자주 읊었던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 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푸른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1998.11.22.
엊그제 복음의 내용은 “끝자리에 앉아라”였고, 오늘은 “불쌍한 이들을 초대하여라”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을 반영하는 예수님 마음입니다. 여기서 연상된 것이 가장 끝자리에서, 또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를 연상했습니다. 바다하면 제가 좋아하는 동요가 있습니다.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것같애”
어머님을 성모님으로 바꿔 산책때 마다 부르는 노래입니다. 연민과 겸손의 성모님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닮은 연민(compassion)과 겸손(humility)의 사람은 성모님처럼 바다같은 사람입니다.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믿음은 주로 이해되어야할 이상도, 도덕적 계명도 아니라 만나야 할 분이시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사랑으로 두드리시고, 그분의 눈은 우리의 고통을 연민으로 바라보신다. 천상으로 인도하는 겸손이다. 연민의 시선과 겸손한 마음을 청하자. 연민과 겸손의 도상에 있는 이들위에 주님은 그의 생명을 주시며 죽음에 승리하게 하신다.”
정말 끝자리의 겸손을 선택하는 이들이, 불쌍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자비와 지혜의 바다같은 이들이 하느님을 닮은 바다같은 사랑의 신비가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잔치를 베풀 때 친구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이 아닌 불쌍한 이들을 초대하라 하십니다. 그대로 바다같은 모습이요 이런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체험한 신비가들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가 그 대표적인 분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불쌍한 이들의 보호자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불쌍한 이들을 바다처럼 받아들이는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체험한,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예수님입니다. 신비의 하느님께 경탄하는 바오로의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이방인들은 물론 궁극에는 유대인들까지 인류 모두의 구원을 내다보는, 모든 것이 결국은 잘될 것이라는 긍정적 낙관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정말 대 신비가이자 관상가요 영성가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무상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요 보호자요 목적이시요 우리의 시작이자 마침이 되십니다. 우리 존재의 신비, 삶의 신비도 이런 하느님을 통해서 비로소 해명됩니다. 이런 하느님을 잊을 때 무지와 허무의 늪에서 방황하다 그 인생 끝낼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 바치는 흠숭의 찬미와 감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연민과 겸손, 자비와 지혜의 신비가로 만들어 줍니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시편84,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