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 -하느님 중심의 삶-2024.1.9.연중 제1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0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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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9.연중 제1주간 화요일                                                            1사무1,9-20 마르1,21ㄴ-28

 

 

참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

-하느님 중심의 삶-

 

 

어제 일간신문 1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스마트폰이 아이 뇌 잠식...‘도파민 인류’출현이란 제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알파(Alpha)세대. 인류통계학자들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인 2010년 이후 태어난 세대를 알파 세대라고 부른다. 알파세대가 잃은 것, 문해력, 사회성. 뇌발달 막는 스마트폰...집중력, 충동 조절, 언어능력 저하.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뇌가 일찌감치 유투브 등 짧은 영상 ‘쇼트폼’(Short-form)에 노출되면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정적인 활동에 흥미를 잃게 됐다고 지적한다. ‘짧은 유투브 동영상은 서사가 없어요. 그저 게임처럼 자극적으로 들어오는 거죠. 가만히 책 읽는 행위는 아이들에게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요.’ 스마트폰에 흥미를 뺏긴 아이들은 글을 낯설어하고 있다.”(한겨레2024.1.8.)

 

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세대에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위기의 시대, 알파시대입니다. 현대판 악마가 되고 있는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입니다. 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동영상의 유혹이나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참으로 분별력과 자제력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저만해도 2000년까지는 손으로 온통 강론을 쓰다가 지금은 노트북을 사용하니 손으로 글 쓰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사실 요즘 손으로 쓴 친필 편지를 받아보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그래서 얼마전 부터는 만년필을 구입해 손 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보속시 '말씀 처방전'은 반드시 만년필로 씁니다.

 

보고 배웁니다. 듣고 배웁니다. 읽고 배웁니다. 가상의 세계가 아닌, 직접적인 살아 있는 만남의 관계가 사람됨에 결정적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기도도 겸손도 순종도 성실도 진실도 침묵도...보고 듣고 읽고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여정입니다. 수도자의 기본 자질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라 했습니다. 영적지도의 두 목표는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것, 그리고 자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권위 역시 보고 배웁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하겠지만 권위는 필수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리면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신뢰와 비전을 지닌 권위의 사람은 모두가 배움의 대상,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보고 배우는 공동체 지도자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권위 상실보다 큰 불행은 없습니다. 지도자가 권위를 잃으면 나라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가정이 무너집니다. 권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에 맞는 참권위의 형성이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답게’ 사는 분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로 말하면 존엄한 품위와 권위의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42년전, 1982년 늦깎이로 34세에 수도원에 입회하고 대학에 편입하여 희랍어를 배울 때 '권위'라는 단어 뜻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권위(ex-ousia)’, 즉 ‘존재로부터’ ‘안으로부터’ 나온 권위의 어원입니다. 밖에서 덧붙여진 권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로부터 자연스럽게 저절로 흘러나온 권위입니다. 

 

옷 잘 입었다고, 지위가 높다고, 재물이 많다고, 배운 것이 많다고, 학식이 많다고, 예쁘다고, 권력을 많이 지녔다고 권위가 아니라,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참되고 고결한,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품이, 인격이, 품격이, 저절로 권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런 권위는 직감적으로 감지되며 이런 참 권위 앞에는 저절로 승복하게 됩니다. 

 

어떻게 참 권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답을 줍니다.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참 권위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에 항구하여 날로 하느님을 닮아 겸손하고 온유한, 진실하고 성실한 참나가 되어갈 때 저절로 참 권위입니다. 하느님과 날로 깊어가는 신망애와 삶과 더불어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 권위입니다. 

 

그러니 어린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은 어른이나 부모의 이런 권위를 보고 배웁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어른에게서는 꼰대가 아닌 참 어른으로서의 신선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의 위력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권위를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권위 있는 꾸짖음에 더러운 영은 큰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 고백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움직이는 중심의 산같은 권위의 예수님입니다. 이런 참 권위 앞에 사람들은 저절로 존경과 사랑을 드리기 마련입니다. 저절로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 질서가 이뤄집니다. 24년전 불암산을 닮고 싶은 마음에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 일화를 생각하며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18년전, 그리고 14년 전 써놨던 두 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산이다”-2006.4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2010.12

 

참 권위의 큰 어른을 상징하는 불암산을 닮고 싶은 마음에 흠모하며 쓴 시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권위가 아닙니다. 날로 주님과의 깊어지는 신망애의 관계가 참 권위의 사람, 참 권위의 어머니로 만듭니다. 1독서 사무엘기 상권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저는 어머니의 참 권위의 비결을 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제 경우도 이에 해당됩니다. 지금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세월지나면서 더욱 그리워지는 어머니입니다. 아무리 나이 먹어도 어머니의 자식일뿐 같습니다. 제1독서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의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 한나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오늘 미사중 화답송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흡사 마리아의 마니피캇 찬미가를 연상케 합니다. 한나 어머니의 하느님 찬미의 삶, 바로 참 권위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참 권위의 원천인 주님을 닮아갈 때 주어지는 참 권위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감으로 주님을 닮은 존엄한 품위를 지닌 참 권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거룩한 소명이자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 참 권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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