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의 여정 -안으로는 회심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 -2024.1.25.목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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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5.목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사도22,3-16 마르16,15-18

 

 

회심의 여정

-안으로는 회심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 -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오늘로서 1.18일부터 시작한 일치주간도 끝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에서 공히 참 좋아하는 성인이 바오로 사도,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제가 프란치스코 세례명을 갖게 된 것도 예전 개종하기전 개신교에서 유일하게 알았던 성인이 프란치스코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분들의 특징은 전격적 회심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중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정말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극적입니다. 

 

바오로의 극적인 회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주님께서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인내하며 기다렸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당신 사람으로 점찍어 놓은 사람은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성 스테파노의 거룩한 순교 장면을 시종일관 겪었던 사울이었으며 아마 주님은 이후로도 결정적인 계기를 기다렸던 듯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목하셨던 것은 바오로 사도의 한결같은 불같은 열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22장은 바오로 사도의 일장 연설중 자기의 전 회심과정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그가 얼마나 신자들의 박해에 극성스러웠는지 바로 그때에 주님이 개입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바오로의 회심에 앞서 주님과의 극적 만남의 장면이 너무 생생합니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바오로 사도를 비추자 그는 바닥에 엎어졌고 이어지는 주님의 개입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다.”

 

이 장면은 늘 읽어도 새롭고 신바람이 납니다. 주님은 바오로가 박해하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새삼 주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행위는 그대로 주님께 하는 행위임을 깨닫습니다. 믿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라는 놀라운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후반부 최후심판(마태25,31-46) 이야기중 다음 대목을 연상케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아마도 바오로 사도를 회심으로 이끈 이 생생한 주님과의 만남을 바오로 사도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아마도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불덩이 같은 선교열정의 원동력이 되었을 체험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주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종들을 다정히 부를 때를 연상케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얼마전의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을 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답하던 사무엘의 모습도 연상됩니다.

 

당신의 때가 되자 주님은 전광석화, 일사불란하게 바오로를 사로잡으니 바오로는 완전히 주님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주님은 이미 예비한 당신의 사람 하나니아스가 주변을 대변하여 주님의 뜻을 전합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당신이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을 만나 회심과 더불어 눈을 뜨니 이젠 예전의 사울이 아닙니다. 주변은 그대로 이나 보는 내적 눈은 완전히 바뀌어졌을 사울입니다. 이제 주님의 증인으로서 새로운 선교사명이 사울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의 불이 되어 곳곳에 마침내 로마에까지 복음의 불을 붙이니 활활 타오르는 복음의 불은 미구에 전 유럽을 타오르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바오로의 눈부신 전교활동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말그대로 오늘 다음 복음 말씀 처럼 사명을 수행한 바오로 사도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무슨 복음입니까?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모두가 이런 주님과 일치되어 무지와 허무의 노예살이 어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감이 복음 선포의 궁극 목표입니다. 생명이요 빛이요 길이요 희망이요 진리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니, 이런 파스카 예수님 아닌 복음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산불처럼 번지는 복음의 불, 사랑의 불, 말씀의 불,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불이요, 지금도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선교의 불, 복음의 불입니다. 

 

주님께 만약의 가정은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바오로가 없었다면? 부질없는 질문이요 이미 주님께서 예비한 당신 복음의 일꾼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여기 살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 섭리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저는 다시 산대도 이렇게 뿐이 못살 것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살아갈 복음 선포의 장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과 더불어 깊이 성찰해야 할 우리의 회심의 여정입니다. 바오로의 결정적 회심으로 회심은 끝났을까요? 분명히 확신하건데 아닐 것입니다. 순교의 그날까지 계속되었을 회심의 여정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똑같이 회심의 여정입니다. 우리 요셉수도원의 첫 순교자처럼 생각되는 정훈만 세례자 요한 수사가 떠난지도 11년째요, 그가 만들어 정자에 붙여놓은 “回心亭(회심정)명패는 여전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주님과 만남의 여정, 회심의 여정, 친교의 여정, 성화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내 삶을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으며, 어느 정도의 성덕(聖德)에 도달해 있는지 가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회심의 여정과 함께하는 선교의 여정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본질적 사명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안으로는 주님과 회심의 “친교”,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선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바, 친교와 선교, 수렴과 확산의 리듬에 따라 날로 복음화되는 세상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열매, 회심의 열매, 친교의 열매를 세상과 나누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끝으로 우리 정주 요셉수도원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수도원 자체가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장이요,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로,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로 사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끊임없이 거행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에서의 환대를 통한 섬김과 나눔의 선교, 저는 바로 이것을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선교라 부릅니다. 이를 요약한 고백시를 나눕니다. 회심의 친교 열매는 환대의 선교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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